항목 ID | GC05102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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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樓亭 |
이칭/별칭 | 정루(亭樓),정각(亭閣),정사(亭榭)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김태훈 |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집.
[개설]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로서 정루(亭樓)·정각(亭閣)·정사(亭榭) 라고도 부른다. 평면구조는 정사각형으로부터 직사각형·육각형·팔각형·자 형·부채 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직사각형이 대부분이다.
누정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널리 보편화된 극히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이는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자연경관을 즐기고 이와 더불어 생활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누정은 산좋고 물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심신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도 강조된다.
특히 이러한 성격은 누각보다 정자에서 더욱 강하다. 정자는 사생활의 일면을 담당하는 건축물로 구조와 규모, 의장이 자유롭고 자연과 완전 동화된 공간구성을 보인다. 그러나 누각은 공공시설로서 지역단위의 특정성으로 인해 정자보다 규모와 법식에 있어서 더욱 고급을 요구한다. 누각은 많은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곳으로 위치에 따라 풍류·교육·접대·공공의식 등 복합적 기능을 겸하도록 구성 되었다. 즉 누각은 정자의 분위기를 가지면서 다양한 기능을 가졌다.
[누정의 역사]
언제부터 누정이 우리나라에 지어졌는지 정확히 단정할 수는 없다. 형태상의 특징으로 보아 그 연원을 고구려의 부경(桴京)이라는 작은 창고와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원두막 등에서 찾을 수 있어 고대부터 누정을 지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는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중 의자왕조에 "655년(의자왕 15) 태자 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에 앞서 636년(무왕 37)에는 망해루에서 군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도 망해정을 지은 같은 해에 월성(月城) 내에 고루(鼓樓)를 세움으로써 삼국 시대에 이미 궁원(宮苑) 내에 누정의 축조가 일반화되었으며, 연회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고문헌에서도 황제의 고귀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누각건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 중에 "방사가 무제에게 아뢰기를 ‘황제는 5성12루(五城十二樓)를 만들어 신인(神人)을 기다렸다 합니다’라고 하니, 곧 50장(丈)이나 되는 신명대 정간루(井幹樓)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도 누각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함이 아니고 신선이 되기 위함이었으며, 사용자의 고귀성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누정의 활용]
누정은 일상생활에서 휴식의 의미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절경에 독립된 단일 건물로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궁궐·사찰·향교·서원 또는 일반주택의 부속건물로 세워지기도 했다.
궁궐의 후원에 향연을 위한 누각을 세우기도 했는데, 경복궁의 경회루는 그러한 예로 『주역』의 원리를 적용한 철저한 사상적 배경과 최고의 기술을 바탕으로 선인의 세계를 꾸미고 있다.
관아 시설 중 객사에도 누각을 만들어 접대·향연 및 풍속에 따른 의식을 가졌는데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 청풍의 한벽루가 유명하다.
사찰의 공간구성은 크게 일주문·천왕문 등과 같은 문들에 의해 그 영역이 구분되는데 최고의 영역인 대웅전 앞마당에 누각을 세우는 예가 많다. 대웅전 앞마당의 지표보다 낮게 세워진 건물을 문이나 누(樓)라고 하는데 건물의 밑을 통과해 조심스럽게 올라서면 대웅전과 탑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는 부석사 안양루, 전등사 대조루를 들 수 있다.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누각이 진입하는 문의 기능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화엄사 보제루, 범어사 보제루, 장곡사 운학루, 봉정사 덕휘루가 그 실례이다. 법당 앞에 만들어진 누는 법당 앞마당과 수평 연장된 바닥을 이루어 법당 문을 열어놓고 불자들이 누마루에서 법당을 향해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고승의 법문을 듣기도 하는 순수 의식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향교나 서원의 출입문 상부를 누각 형식으로 만들어 훈장들의 풍류 또는 접객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했으며, 때로는 유생들의 여름철 강학(講學)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 상류층의 주택에서도 대청에서 한두 단 높게 바닥을 만들고 앞으로 돌출시켜 누마루를 만드는 일이 많았다. 돌출된 누마루 주위에는 연못을 만들거나 보기좋은 수목을 심어 생활 속에서 선인(仙人)의 경지를 찾으려고 했다. 이와 같이 누정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자연환경에 부합되는 건축으로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이다.
[영천의 누정]
영천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기거한 곳 답게 누정이 여러곳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강호정(江湖亭)은 임진왜란 때 의병 대장인 정세아(鄭世雅)가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1599년(선조 32) 용산동에 창건한 정자인데, 영천댐 건설로 1977년 3월 현 장소로 이전·복원하였다.
삼휴정(三休亭)은 삼휴(三休) 정호신(鄭好信)이 학문 증진을 위해 1635년(인조 3)에 건립한 것으로 1977년 3월 영천댐 공사로 현 위치에 이전, 복원했다.
조양각(朝陽閣)은 금호강변에 있는데, 명원루(明遠樓) 또는 서세루(瑞世樓)라고도 부르며, 1368년(고려 공민왕 17) 당시 부사 이용(李容)이 포은 정몽주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1482년(성종 13) 부분 수리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7년(인조 15)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새로 지어 이름을 조양각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