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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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巖里 |
영어공식명칭 | Giam-ri |
이칭/별칭 | 보터바우,보텅바우,버텅바우,복기암(伏奇岩),복기암(洑基巖)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기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근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기암리는 축산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리는 기암1리와 기암2리로 분리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기암1리의 버텅바우 마을과 기암2리의 삼남문, 윗말, 아랫말이 있다.
[명칭 유래]
기암리(奇巖里)는 마을 입구에 기이한 바위가 있다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바위 밑으로는 보(洑)를 막았으므로 보터바우라 불리고, 이것이 변하여 보텅바우·버텅바우 또는 복기암(伏奇岩)이라 하였다.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복기암(洑基巖)으로 나오고, 1890년 후반에 발간된 『경상북도 영해군 읍지』에도 복기암이 기록되어 있다.
남동쪽 축산천 좌안에 자리한 기암1리는 입구에 거북이와 개구리 모양의 바위가 엎드려 있어 버텅바우마을로 불리며 1545년(명종 원년)에 안씨라는 인물이 터를 잡고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북쪽 동로천의 좌안에 자리한 기암2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피란 온 안씨라는 인물이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입구가 세 갈래 큰 골로 되어 있어 삼남문(三南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어 윗말[웃모태]에 입주한 평산신씨(平山申氏)와 아랫말[아랫모태]에 박씨가 들어와 3성이 살게 되어 아삼(我三)이라 하였다고도 하나, 건너편에 어금니처럼 생긴 바위가 세 개 있어 아삼(牙三)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기암리는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 남면(南面)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지방관제 개편 시 '영해부'가 '영해군(寧海郡)'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아삼동(牙三洞)과 묘곡면(畝谷面)의 칠성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기암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하였다. 1945년에 복기암은 기암1동으로, 아삼과 칠성동 일부 및 속고실을 기암2동으로 분동하였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기암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기암리는 서부와 남부에 분포하는 높이 약 150~200m 산지와 동부·북부에 형성된 축산천·동로천의 충적평야로 구분된다. 서부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축산천에 유입하면서 고시밭골·다부골·남자골·큰골 등의 크고 작은 골짜기를 형성하였고, 곡류하는 축산천과 동로천의 활주사면에는 범람원이 발달하였다.
[현황]
기암리의 2020년 말 면적은 6.94㎢이며, 2021년 5월 기준 총 54가구[기암1리 29가구, 기암2리 25가구]에 98명[남 56명, 여 42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는 고곡리, 서쪽으로는 대곡리, 남쪽으로는 영덕읍 화천리, 북쪽으로는 부곡리와 상원리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좌부장(左部將)을 지낸 안동인(安東人) 권응상(權應尙)의 재사(齋舍) 원모재(遠慕齋)와, 이조정랑(吏曺正郞)을 지낸 수안인(遂安人) 김성정(金成鼎)의 추모지소(追慕之所)인 경산정(鯨山亭) 등이 있다. 주요 도로는 동쪽에서 북류하고 있는 축산천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북쪽에서 축산천에 유입되는 동로천을 따라서도 동서 방향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칠성들에서 벼농사를 하고 있으며, 사과·배·복숭아 등의 과실류와 참깨·들깨 등의 특용작물을 재배하며, 경제작물인 시금치·토마토·파·양파·고추 등을 점차 확대하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