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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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內里 |
영어공식명칭 | Seongnae-ri |
이칭/별칭 | 성안,읍내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근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성내리는 영덕군 영해면의 동쪽에 자리하며 행정복지센터가 있다. 행정리는 성내1리·성내2리·성내3리·성내4리·성내5리로 분리되어 있다. 성내1리는 동문 밖에 있는 마을로, 시거문동(屍去門洞)·서문동(西門洞)이라 하였고, 성내2리는 동쪽 독묘(纛廟)가 있는 마을로 노동(路東)이라 하였고, 성내3리는 남문 밖에 있는 길을 기준으로 노상(路上)과 노하(路下)를 합하여 칭하였다. 성내4리는 서쪽 못골(池洞)과 남문 밖 노하(路下) 일부를 합하여 불렀고, 성내5리는 북문 밖에 있는 마을로 불렸다.
[명칭 유래]
성내리(城內里)는 조선시대 영해부(寧海府) 읍성(邑城) 안에 있다고 해서 성안 또는 성내라 칭하였다.
[형성 및 변천]
성내리는 고대시대에 부족국가인 우시국(于尸國)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 경덕왕 16)에 유린군(有隣郡)의 중심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예주(禮州)의 관아(官衙)가 있었고, 고려 중기에는 단양(丹陽)의 관아가, 고려 후기에는 덕원(德原)의 관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3년(태종 13)부터 영해부(寧海府)로 개칭하여 부사(府使)를 두었다. 고려시대 전기까지 영양·청기·영덕·기성·울릉도까지 관장하는 부(府)의 소재지가 되었으나, 1895년(고종 32)에 군수(郡守)를 두고 병곡·창수·축산과 영양 석보면(石保面)까지 성내리에서 관장하였다. 이후 1906년 석보면이 경상북도 영양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 영해군은 영덕군에 통합되고 면(面)으로 강등되어 성내리는 오늘날 면 소재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소재지였으나,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노상동(路上洞)·노하동(路下洞)·지동(池洞)과 송계동·교동(校洞)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성내동이라 하고 행정구역상 성내1구에서 4구로 분동되어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성내1리·성내2리·성내3리·성내4리가 되었다. 이후 1996년 1월 1일부터 성내1리·성내2리·성내3리·성내4리·성내5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환경]
성내리 남쪽은 높이 약 150~200m 산지가 분포하고, 북쪽은 송천(松川)이 만든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어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높이가 낮아진다. 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북류하면서 자밭골·뱀골·성짓골·외숙골·인식골·지리골·한자골[한절골·한잣골]·하얏골 등의 크고 작은 골짜기를 형성하였고, 산지 말단부에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황]
성내리의 2020년 말 면적은 4.50㎢이며, 2021년 5월 기준 총 1,616가구[성내1리 684가구, 성내2리 134가구, 성내3리 230가구, 성내4리 141가구, 성내5리 427가구]에 2,982명[남 1,367명, 여 1,615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성내리는 동쪽으로 괴시리, 서쪽으로 벌영리, 남쪽으로 축산면 도곡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연평리와 접해 있다. 면 소재지로서 영해면의 중심지이며, 영해버스터미널, 영해초등학교, 영해향교 등이 있다. 면 소재지에서는 시장을 비롯하여 상업이 성행하고, 주변 지역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