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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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葦長寺址 |
영어공식명칭 | Wijangsa Temple Site |
이칭/별칭 | 위정사지(葦井寺址),우장사지(雨長寺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박병선 |
건립 시기/일시 | 고려시대 - 위장사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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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830년경 - 위장사 폐사 |
소재지 | 위장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
성격 | 절터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있는 절터.
[개설]
위장사지(葦長寺址)는 고려시대 창건된 위장사의 터이다. 위장사는 조선 초 영해도호부의 자복사(資福寺)[조선 시대에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정책적으로 지정하였던 절]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 이후 중건하였지만 1830년경에 다시 폐사되었다.
[변천]
위장사는 위정사(葦井寺) 혹은 우장사(雨長寺)라고도 불렀다. 창건 시기와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407년(태종 7) 12월 천태종(天台宗) 사찰인 영해도호부의 우장사를 그 고을 자복사로 정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천태종이 유행한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위장사(葦長寺)는 용두산(龍頭山) 우물 곁에 있다”고 하였으나,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위장사는 용두산 우물 곁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의 『범우고(梵宇攷)』에 “위장사는 용두산에 있다. 사찰 근방 산 정상에 한 줄기 갈대가 있어 하늘에 닿고 있었는데, 그 땅에 우물을 파니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하였으며, 사악한 사람이 그 우물에 비치면 물색이 변하여 흙색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828년(순조 28) 경에 편찬된 『단양부지(丹陽府誌)』에는 위장사가 현존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832년(순조 32)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1871년(고종 8)의 『영남읍지(嶺南邑誌)』에는 전혀 언급이 없고, 1939년의 『교남지(嶠南誌)』에 “위장사는 용두산 우물가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위장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었다가, 18세기 말에 중건하였으나 다시 얼마 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치]
신기리 마을 뒤편에 형성된 계곡의 좌측 임도를 따라 1㎞ 들어가면 민묘군이 나타난다. 이 민묘군 뒤편으로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용두산 정상 방향으로 다시 1㎞가량 더 들어가면 좁은 평탄지가 나타나는데, 이 일대가 위장사지로 추정된다.
[현황]
현재 위장사지 일대에서는 석축을 비롯한 유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주변에서 어골문, 무문 와편 등이 확인되고 있어 이 일대가 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위장사에서는 보물인 ‘영덕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이 1395년(태조 4)에 조성되어 1407년(태종 7)에 개금했다고 하는데, 1407년은 위장사가 영해도호부의 자복사로 선정된 해이다. 왕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위장사가 개금불사와 더불어 자복사로 선정되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덕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위장사가 19세기 전반에 폐사되면서 인근의 장육사로 옮겨졌으며, 현재 장육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위장사는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등 18세기까지 영덕 지역의 중심 사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