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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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盈德邑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화개길 9-3[남석리 310]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창국 |
건립 시기/일시 | 1389년 - 영덕읍성 토성으로 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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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427년 - 영덕읍성 석성으로 수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 영덕읍성 터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지표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7년 1월 15일~4월 18일 - 영덕읍성 터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시·발굴조사 |
소재지 | 영덕읍성 터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화개길 9-3[남석리 310] |
성격 | 성터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에 있는 고려시대·조선시대 읍성터.
[개설]
영덕읍성(盈德邑城)은 고려시대·조선시대 읍성(邑城)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석성으로 존재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에 의해 대부분 고을의 읍성이 철거될 때 영덕읍성도 함께 철거되면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변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따르면 영덕읍성은 1389년(공양왕 1) 토성으로 축성되었다가 1427년(세종 9) 석성으로 수축하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야성읍지(野城邑誌)』 등에도 영덕읍성에 관한 기록이 확인된다. 기록을 보면 영덕읍성은 우물과 못이 있고, 성문은 3개소가 있었다. 왜구의 빈번한 침입에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평상시에는 행정 업무를 보는 곳으로 활용하다가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경우 군인과 지역민들이 성내에서 방어 활동을 하였다.
[위치]
영덕읍성 터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에 있다. 서쪽은 절벽으로 오십천과 접하고, 북쪽은 무둔산에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현재 영덕군 청사와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원 동편 담장 아래에 석성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성문이 3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동문지는 현재 법원 정문이 있는 곳이고, 남문은 군청 정문, 서문은 동문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한화건설의 하수관거 정비처리 시설사업에 의해 2005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2007년 1월 15일부터 4월 18일까지 시·발굴조사 되었다. 조사 결과 성(城)돌로 추정되는 석재 매립지 1개소, 근대 구들유구 1기, 근대 석렬유구(石列遺構) 1기, 근대 배수로 유구 1기 등 총 4기가 확인되었으며, 성터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사 범위 밖에서 확인된 영덕읍성을 가실측 조사한 결과 읍성의 범위는 현재의 영덕군청, 영덕군의회 영역의 경계를 따라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 예상 규모는 20,000㎡이고 둘레는 약 540m로 추정된다. 육안으로 확인된 성벽은 5개소[311-1번지, 310-6번지, 군청 정문 좌측 경계, 의회 북서 모서리, 의회 북동 모서리]에 잔존하며, 특히 의회 앞 민가 311-1번지에서는 곡성의 형태가 확인되었다. 5개소 중 영덕군청의 동쪽 담장 밖인 310-6번지 이벤트기획과 이발관 건물 일대에 잔존하는 성벽 구조를 살펴보면, 하부에 입면상 0.7~1.3m의 큼직한 화강석 등의 돌을 쌓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다. 잔존 단수는 3단이며, 큰 돌 사이는 작을 돌로 틈새를 막음한 일반적 석성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현황]
영덕읍성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성벽은 5개소에 잔존하며, 영덕군의회 청사 북동쪽 담장 아래에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성벽의 기저부는 다소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영덕읍성은 조선시대 영덕 지역의 정치와 행정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성벽이 남아 있는 지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훼손이 진행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보호조치가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