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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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文寶 |
영어공식명칭 | Baek Munbo |
이칭/별칭 | 화부(和父),담암(淡庵),직산군(稷山君),충간공(忠簡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고려 후기 영덕 출신의 문신.
[개설]
백문보(白文寶)[1303~1374]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연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밀직제학(密直提學)·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다.
[가계]
백문보의 본관은 대흥(大興), 자는 화부(和父), 호는 담암(淡庵)으로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수원백씨(水原白氏)에서 분파된 대흥백씨(大興白氏)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역임한 백견(白堅)이며 어머니는 영해박씨(寧海朴氏)이다. 백문보의 선대는 충청도 직산에 세거하였는데, 백견이 영해박씨와 혼인하면서 경상도 영해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백문보는 충숙왕 연간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후 춘추관(春秋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우상시(右常侍)가 되어서는 시폐(時弊)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리판서가 되어 10과(科)를 설치하여 선비를 선발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밀직제학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백문보는 충숙왕~충혜왕 대에는 주로 간관(諫官)으로 활동하며 당대의 정치 현실에 깊이 관여하였다. 충목왕 시기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으로 활동해 폐정개혁(弊政改革) 등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기획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공민왕 대에는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인재등용과 인사행정의 혁신을 상서(上書)하고 있어 당대 개혁정치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성품이 청렴·정직하고 이단(異端)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고 전한다.
[학문과 저술]
백문보는 15세에 「역학설(易學說)」을 지을 만큼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으며,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수학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역사상 숭불(崇佛)이 미친 폐단을 적시해 이를 배척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곡(李穀)·안축(安軸)·이달존(李達尊)·이암(李嵓)·민사평(閔思平) 등과 교유하면서 당대 성리학의 확산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후손들이 편찬한 『담암집(淡庵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