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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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毅長 |
영어공식명칭 | Park Uijang |
이칭/별칭 | 사강(士剛),청신재(淸愼齋),무의공(武毅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칠성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555년 - 박의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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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7년 - 박의장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박의장 진해현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박의장 경주판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박의장 경주부윤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9년 - 박의장 성주목사 겸 방어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0년 - 박의장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박의장 경상좌병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5년 - 박의장 공홍도 수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박의장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67년 - 박의장 정충사우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784년 - 박의장 무의 추시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
부임|활동지 | 경주부 - 경상북도 경주시 |
부임|활동지 | 성주목 - 경상북도 성주군 |
묘소|단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리 |
사당|배향지 | 정충사우[구봉서원] - 경상북도 영해면 원구리 577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무안 |
대표 관직 |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무신.
[개설]
박의장(朴毅長)[1555~1615]은 무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여러 공을 세웠으며, 관직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올랐다.
[가계]
박의장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강(士剛), 호는 청신재(淸愼齋)이다. 아버지 현감 박세렴(朴世廉)과 어머니 남시준(南時俊)의 딸 영양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이며 4남 3녀를 두었다. 박의장의 활약으로 무안박씨 영해파는 영남 지역의 명문 가문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활동 사항]
박의장은 1577년(선조 10)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의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를 시작으로 군기시참봉(軍器寺參奉)·부봉사·봉사·직장·주부를 거쳐 종4품 진해현감에 부임해 선정을 펼쳤다. 1591년 경주판관에 임명된 다음 해 임진왜란을 맞이하였다. 박의장은 전쟁 발발 직후 동래성을 구원하러 달려갔으며, 7월에는 영천성 수복 전투를 직접 지휘해 왜군의 침략로와 보급로를 봉쇄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경상좌병사 박진(朴晉)과 연합해 1·2차 경주성 탈환 전투에 참여했는데, 특히 2차 전투에서는 유격전법 전술과 신무기 비격진천뢰를 활용해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승리를 두고 이순신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하였다.
1593년 3월에는 대구 파잠에서 왜적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당상관으로 특진되어 경주부윤에 제수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도 안강·양산전투를 비롯해 울산 도산성(島山城)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박의장은 1599년 성주목사겸 방어사, 1600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1611년 인동부사·경상좌병사를 지냈다. 공홍도 수사 재임 중 관아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의장은 아버지와 둘째 아버지의 주선으로 13세 때 퇴계 이황의 제자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경서와 사서를 배움에 있어 한 번 본 것은 모두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다. 동문인 신지제(申之悌), 권태일(權泰一)과 교유가 깊었다.
[묘소]
박의장의 묘갈명은 번암(樊巖) 채제공이 지었으며, 묘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리에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이 종결되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667년(현종 8) 영해 유림의 공의로 정충사우(貞忠祠宇)[구봉서원(九峰書院)]를 세워 박의장을 배향하고 있다. 1784년(정조 8) 무의(武毅)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