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698
한자 南佶
영어공식명칭 Nam Gil
이칭/별칭 정경(正卿),안분당(安分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 남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7년 - 남길 진사시 입격
몰년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남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04년 - 남길 광산서원 제향
출생지 원고리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부포리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부포리
묘소|단소 화전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광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영양
대표 관직|경력 진사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남길(南佶)[1595~1654]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광산서원(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남길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정경(正卿), 호는 안분당(安分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장(部將)을 지낸 남광(南廣), 할아버지는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낸 남의록(南義祿), 아버지는 진사(進士) 남경훈(南慶薰), 어머니는 첨정(僉正)을 지낸 이준(李濬)의 딸 재령이씨(載寧李氏), 부인은 첨정을 지낸 신효남(申孝南)의 딸 영해신씨(寧海申氏)이다.

[활동 사항]

남길은 1595년(선조 28)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원고리(元皐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가례(家禮)』에 따라 상·장례를 치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배우고자 예안현(禮安縣) 부포리(浮浦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부포리]에 집을 짓고, 이황의 여러 재전(再傳)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때 성이성(成以性)도 옮겨와 남길과 이웃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진사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성균관 유생들이 올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廢妃) 상소에 연명하였다. 이어 치러진 알성문과의 급제자가 발표되고, 광해군이 문묘를 배알하였다. 이때 이영구(李榮久)가 주도하여 인목대비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자, 남길은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알성시 급제자들을 모두 제명하였고, 광해군의 문묘 배알 때 상소문을 올린 자들을 조사하였다. 남길은 이름이 없어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후 경계하며 고향에 은거하였다. 1624년 난고종택(蘭皐宗宅)[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1길 13-11]을 건립하였다.

[학문과 저술]

남길이 지은 시(詩)·부(賦)·서(書)·기(記)와 남길의 행적을 엮은 「안분당유고(安分堂遺稿)」가 『영산가학(英山家學)』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花田)에 묘소가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정범조(丁範祖), 묘지명(墓誌銘)은 류치명(柳致明)이 지었다.

[상훈과 추모]

1804년(순조 4) 남경훈·남길 부자를 제향하는 광산서원[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소재]이 건립되었다. 광산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고, 그 유지(遺址)에 표석을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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