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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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運錫 |
영어공식명칭 | Shin Unseok |
이칭/별칭 | 신응천,신청헌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39년 - 신운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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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신운석 영덕의진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896년 8월 3일 - 신운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9년 3월 1일 - 의병장청헌신운석공순국기념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신운석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 영덕읍 화개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덕의진 의병장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의병.
[가계]
신운석(申運錫)[1839~1896]은 경상북도 영덕 영덕읍 화개리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응천(應天), 호는 청헌(淸軒)이다.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다.
[활동 사항]
1895년 청일전쟁에서 유리한 기세를 잡은 일본군이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11월에는 개화라는 명분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단행하게 하는 등 노골적인 침략 책동을 드러냈다. 따라서 전국 유생들은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수호하고자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비롯하여 청송(靑松)·영양(英陽)은 물론 영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3월 지품면(知品面) 출신 김건(金健)이 창의장이 되어 영덕의진을 일으켰으나 곧 물러나고, 신운석이 뒤를 이어 의진을 이끌었다. 영덕의진은 3월 11일 영덕군 남정면 부경동(阜境洞)에 진을 치고 매복하였다가 3월 13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물러나 영덕읍 남천쑤[남천 숲]에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신운석은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대하여 불굴의 기상으로 격퇴하면서 전세가 일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신운석은 5월 24일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남하한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에 합세하였다. 6월 4일 영덕 오십천의 남천쑤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남천쑤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신운석은 지품면 신양동(新陽洞)으로 진을 옮겼다가, 6월 20일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고 지품면 율곡리(栗谷里)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삼종질 신태홍(申泰洪)이 신운석으로 오인되어 관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있었다. 신운석은 자신 때문에 고생한 집안 조카를 생각하여 스스로 관군에 출두하여 자신이 의병장임을 밝히고 신태홍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청심분파소에서 문초를 받자 혀를 깨물고 불응하다가 1896년 8월 초3일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9년 3월 1일에 ‘의병장청헌신운석공순국기념비[경상북도 영덕읍 화개리 208-1 소재]’가 건립되었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