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34
한자 盈德義陣
영어공식명칭 Yeongdeok Righteous Army
이칭/별칭 영덕의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6년 3월연표보기 - 영덕의진 창의
해체 시기/일시 1896년 8월연표보기 - 영덕의진 해산
최초 설립지 영덕의진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설립자 김건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에 있었던 의병 부대.

[개설]

영덕의진(盈德義陣)은 1896년 3월 설립된 영덕 지역의 전기 의병 부대이다.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 및 청송의진(靑松義陣)과 함께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오십천 남천쑤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적을 벌였으나, 대장 신운석(申運錫)이 순국하면서 해산되었다.

[설립 목적]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이른바 전기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당시 의병을 일으킨 보수 유림의 구호는 ‘토적복수(討賊復讐)[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을 것]’와 ‘보형보발(保形保髮)[두발과 복장을 가지런히 할 것]’이었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내 역적들과 국권을 침탈하고 있는 일본 침략 세력들을 제거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고 고유 문화를 지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변천]

영덕의진은 1896년 3월 무렵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에서 조직되었다. 조직 당시 의병 대장은 김건(金健)이었으나, 3월 13일 이후에는 신운석이 대장을 맡았다. 1896년 6월 4일 오십천 남천쑤 전투와 6월 20일 지품면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8월 3일 신운석대장이 순국하면서 해산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덕의진의 첫 전투 기록은 1896년 3월 13일이다. 영덕의진은 3월 11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부경리에 매복해 있다가 3월 13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뒤 영덕의 남천 숲까지 후퇴하였지만, 영덕 지역 청장년들이 궐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후 영덕의진은 사통(私通)으로 청송의진과 군사적으로 협조 관계를 형성하였다.

4월 2일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 주도로 청송군 감은리(甘隱里)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출진하여 4월 5일 저녁 이전평(梨田坪)에 도착했다. 당시 영덕의진은 군문도지휘겸총포장(軍門都指揮兼摠砲將) 김노헌(金魯憲), 전방장(前防將) 심의종(沈宜宗), 후방장(後防將) 신병렬(申炳烈), 서기 안문익(安文翼) 이하 포군 4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참전하기 전에 감은리전투에서 청송의진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청송의진에 들러 승리를 축하하고 4월 7일 영덕으로 회군하였다.

4월 8일 대구 관군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의 출병에 위협을 느낀 영덕의진은 청송의진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급보를 보냈다. 4월 9일에는 경군(京軍)이 영덕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4월 10일 청송의진은 포군 3초(哨)를 이끌고 와서 영덕의진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영덕의진은 이미 원척(元陟)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김노헌 등 12명의 부상자를 낸 채 무너진 뒤였다. 이에 청송의진도 돌아갔다.

이렇게 영덕 지역으로 관군과 일본군이 몰려오자, 주변 각지의 의병 부대들이 영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김하락의진은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에서 패한 뒤 5월 19일 영덕 장사(長沙)를 거쳐 5월 22일 영덕에 도착하였다. 또한 청송의진도 영덕으로 와서 영덕의진과 합세하였다. 이에 신운석은 100여 명 규모의 영덕의진을 결성하고, 청송의진과 함께 성 밖에 진을 쳤다. 6월 1일 김하락의진은 청하(淸河)에서 일본군이 영덕으로 북상 중이라는 첩보를 듣고, 100여 명의 군사로 먼저 출정하였다. 6월 3~4일 이틀 동안 오십천 남천쑤에서 영덕의진·김하락의진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첫날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는 듯했으나, 이튿날에는 수백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쳐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의병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김하락은 결국 탄환 2발을 맞아 중상을 입고 강물에 투신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하락이 전사하고 그의 의진이 흩어지자, 영덕의진은 지금의 경상북도 지품면 신양리로 진을 옮겼다. 6월 20일 일본군과 다시 격전을 치렀으나 패전하였다. 이후 관군에 자진 출두한 신운석이 8월 3일 총살당하자 영덕의진 활동도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덕의진을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현재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영덕의진과 합세한 다른 의진의 기록을 통해 그 실체를 추정할 수 있다. 비록 기록은 적으나 인접 의진과 협조 체제를 유지하면서 이 무렵 영덕 지역 유림들의 구국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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