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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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丹山書院 |
영어공식명칭 | Dansan Seow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건립 시기/일시 | 1608년 - 단산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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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667년 - 단산서원 이건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단산서원 훼철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09년 - 단산서원 사루 건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44년 - 단산서원 중건 |
현 소재지 | 단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
원소재지 | 단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성격 | 서원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 있던 조선 후기 서원.
[개설]
단산서원(丹山書院)은 우탁(禹倬)[1262~1342]·이곡(李穀)[1298~1351]·이색(李穡)[1328~1396]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제향자 우탁의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역동(易東)으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지냈으며,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하였다. 이곡의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가정(稼亭)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등을 지냈다. 문명이 있었고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을 남겼다.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영해(寧海)에 정착하였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 호는 목은(牧隱)으로 이곡의 아들이다. 공민왕 연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발탁되어 신흥 사대부 양성에 앞장섰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이 배출되었다.
[위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의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단산서원이 있었다.
[변천]
단산서원은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축산면·창수면·병곡면 일대] 유림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이를 주창한 이는 신활(申活)[1576~1643]이다. 신활 등은 영해 지역 문풍 진작을 위해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 노경임(盧景任)과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에게 청원하여 1608년(선조 41) 단산서원을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석대봉(石臺峰) 아래에 처음 건립하고, 우탁을 제향하였다. 우탁은 영해사록을 지냈으며, 재임 중 팔령신(八鈴神) 음사를 없앤 적이 있었다.
1614년(광해군 6) 예안(禮安) 역동서원(易東書院)을 본받아 원규(院規)를 제정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이색도 제향하려 했으나, 유림 간의 의견 차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631년(인조 9)이 되어서야 신활 주도로 이색이 추향될 수 있었다. 1656년(효종 7)에는 한성에서 이색 영정을 가져와 묘우 한쪽에 감(龕)을 만들고 봉안하였다.
1667년(현종 8) 기존 서원 자리가 협소한 데다 건물이 퇴락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로 이건하였다. 이때 영해 유림들은 김응조(金應祖)에게 제반 사항을 문의하였고, 경상도관찰사 이태연(李泰淵)과 영해도호부사 김옥현(金玉鉉)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1668년에는 우탁·이색의 위패를 이안하면서 이곡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문루 앞에 사루(食樓)를 세웠다. 1843년(헌종 9) 화재로 인해 문루·동재·서재·전사청 등이 소실되었으나, 1844년 이곡의 후손이었던 이경재(李景在)가 지원하여 중건될 수 있었다. 설립 후 여러 차례 사액(賜額)을 청원하였으나, 정부의 첩설 금지령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형태]
철폐되기 전에 단산서원에는 묘우인 3칸의 상현사(尙賢祠), 강당인 8칸의 명교당(明敎堂)이 있었다. 또한 동재와 서재는 각각 사물재(四物齋)와 삼성재(三省齋)로 모두 4칸이었다. 그 외 누각인 남덕루(覽德樓) 10칸, 외삼문인 입도문(入道門) 3칸, 전사청(典祀廳) 3칸, 주사(廚舍) 18칸이 있었다. 또한 묘정 좌우에 1칸씩을 더 두어 동쪽에는 장서각(藏書閣), 서쪽에는 영정각(影幀閣)을 두었다.
[현황]
철폐 이후 현재까지 복설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단산서원은 영해 지역에서 가장 처음 설립된 서원이다. 1609년에는 단산서원에서 향교·향청·서원의 인사들이 모여 「삼소완의(三所完議)」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단산서원은 17세기 이후 영해 지역 향촌사회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