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016 |
---|---|
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이를 계승 실천하고자 하는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개설]
유교는 공자를 조종(祖宗)으로 한다. 공자는 자신이 살던 춘추시대 약육강식의 혼란된 상황이 지속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仁)과 예(禮)를 설파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초기 유교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
삼한(三韓) 시대의 영덕은 우시국(于尸國)으로 불리다가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야시홀군(也尸忽郡)이 되었다. 그러다가 신라 탈해왕 때인 AD 79년에 지방 관리인 거도(居道)의 반격으로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는 영덕 지역이 바로 신라와 고구려의 변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지배층에 국한되었던 유교가 영덕 지역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하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영덕 지역은 오히려 수도인 경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속하게 되었다. 게다가 신라는 신문왕 때인 682년에 국학을 설치하여 『예기(禮記)』와 『논어(論語)』 등의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그 입학 자격을 6두품의 12등급은 대사(大舍) 이하부터 일반인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영덕 지역에서 유교를 공부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문헌이나 유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다. 하지만 교육과 정치의 측면에서 유교를 장려하였다. 성종 때인 992년에는 국자감을 설립하고, 인종 때인 1127년에는 각 주(州)에 향교를 세워 공자에게 제사하는 문선왕묘를 중심으로 명륜당을 설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향교는 의종 때에 이르러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행정 단위가 군(郡) 또는 현(縣)이었던 영덕과 영해에 향교가 설립되기는 요원하였다. 하지만 영덕 지역에 유교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현존하는 자료에 역동(易童) 우탁(禹倬)이 1278년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부 사록(司錄)으로 부임하여 창수면 인량리 일대에서 팔령신(八鈴神)을 모신다는 미명하에 행해지던 음사(淫祀)를 일소했다든가,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예주소학기』에 "영해의 여러 유생들 중에 서울에 과거를 보려고 온 자를 만났다."라는 기록 등이 있다. 이것을 보면 유교가 영덕 지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영해의 향교대현으로 불리던 김택(金澤)이 이곡을 사위로 맞아들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외가인 영해면 괴시리 무가정(無價亭)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고 경학의 대가로 불리던 이곡이 영해에 우거하자 백문보(白文寶)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鄭云敬) 등이 영해로 와서 수학하게 되었다. 영해를 중심으로 유학이 성행하자 1346년 영해부의 장서기로 있던 이천년(李天年)에 의해 영해향교가 건립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영해향교는 나라의 지원을 받아 건립된 것이 아니라, 당시 영해에 있던 유력한 다섯 가문이 힘을 합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을 보면 고려 말기에 이르면 영덕 지역에는 유교가 상당히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고려 말기부터 성행하던 유교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1397년에 지방에 각각 1교씩을 설립하라는 교시를 내렸고, 그에 따라 영덕향교가 태종 때인 1403년에 건립되었다. 그동안 영덕 지역에서 유교가 영해를 중심으로 발전하던 것이 영덕군 전체로 확산되었다. 조선 초기에 영덕 지역에서는 정자영(鄭自英)과 김수문(金秀文) 등 다수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은 고려 말기부터 지역에 자리 잡은 유교가 더욱 흥성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중추원사를 지낸 정자영은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인 김숙자(金淑玆)와 같은 명유와 교유하면서도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써 지역의 유교 발전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조선 초기의 이러한 밑거름이 중기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해는 안동에 인접하여 일찍이 교류가 많았다. 그래서 영해의 많은 학자들이 퇴계의 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먼저 퇴계의 문인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인량리 출신인 백현룡(白見龍)을 비롯해 백인국(白仁國)·박의장(朴毅長) 등이 수학하면서 지역의 문풍을 크게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다음으로 퇴계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학문을 이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들 수 있다. 장흥효는 자신이 배운 퇴계학을 외손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에게 전하였다. 이현일은 그 학문을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전하였다. 이재는 다시 그 학문을 외손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전하였다. 이상정은 안동에서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면서 그 학문이 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 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퇴계의 학문이 안동에서 시작되어 영해로 전해졌다가 안동으로 넘어가 다시 크게 발전하였다고 평가한다. 이후에도 영덕 지역에서는 그 학문이 이어져 해주(海州) 남붕(南鵬)과 도산(道山) 박재헌(朴載憲)과 같은 성리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영덕 지역의 유교는 이렇게 학문적으로만 융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념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전해져 삶의 지침이 되었다. 현존하는 문헌에서 전하는 수많은 효자·효녀·열녀들과 영덕 곳곳에 지금도 남아 있는 효자비·정려각·충효각·효행표창비 등이 이것을 말해 준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조선시대 영덕 지역에 유교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근·현대]
조선시대에서 유교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유교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중반 이후 무력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조선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책임을 유교에 돌렸고, 유교는 몰락을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1920년대에 있었던 신구 교육의 갈등이다. 당시 영덕 지역에서는 신식 학교의 설립을 둘러싼 유림과 청년들 사이의 대립이 일어났다. 청년들은 영해향교의 터에 태화학원이라는 신식 교육기관을 세우겠다고 주장하고, 유림에서는 향교가 유교의 교육기관이므로 거기에 신식 학교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관청이 개입하여 향교의 자리에 신식 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다. 물론 이러한 해결은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과 향교에 대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전의 유교가 갖고 있던 위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렇게 몰락 일로의 길을 걷던 유교는 광복과 함께 성균관유도회를 결성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6.25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를 전후하여 경제적 부흥을 이루면서 우리의 전통적 사상인 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영덕 지역에서는 성균관유도회의 지부를 비롯한 여러 유림 단체가 결성되어 시대에 맞는 유학으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영덕 지역은 과거의 흥성했던 유교적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다른 지역에 비해 유림 단체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