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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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山書院 |
영어공식명칭 | Insan Seowon |
이칭/별칭 | 인산정사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건립 시기/일시 | 1696년 - 인산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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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737년 - 인산서원 1차 철폐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741년 - 인산서원 2차 철폐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774년 - 인산서원 3차 철폐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38년 - 인산서원 1차 재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74년 - 인산서원 2차 재건 |
원소재지 | 인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원소재지 | 인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사천리 |
성격 | 서원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던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인산서원(仁山書院)은 이휘일(李徽逸)[1619~1672]·이현일(李玄逸)[1627~1704] 형제를 제향한다. 이휘일의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존재(存齋)이다. 문집으로 『존재집(存齋集)』을 남겼다. 이현일은 이휘일의 아우로 호는 갈암(葛庵)이다. 17세기 후반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중심인물이자, 숙종 연간 남인계 산림(山林)이었다. 관직은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랐다.
[위치]
인산서원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모지동(茅池洞)에 처음 건립되었다. 옛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에 소속되었던 인량리와 창수면 일대에는 제향자의 후손이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으며, 존재종택(存齋宗宅)·갈암종택(葛菴宗宅) 등의 고택이 남아 있다.
[변천]
1672년 이휘일 사후 바로 서원 설립이 논의되었으며, 1687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당시 건물의 형태는 서원이 아니라 ‘인산정사’로 구상되었다. 1688년 인량리 서쪽 산기슭에 사당 3칸이 먼저 상량되었다. 그러나 8년간 추가 공사가 지체되었다가 1696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 이휘일의 위패를 봉안하기 이틀 전 건물 형태를 정사가 아닌 ‘인산서원’으로 결정하였다.
1704년 이휘일의 아우 이현일이 세상을 떠나면서 추향 논의가 이루어졌다. 1711년에도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현일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유배되면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老論)으로부터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지목된 전력이 있었기에 추향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집권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18년 이현일 추향은 성사되었다.
1737년(영조 13) 영조의 명령으로 인산서원은 철폐되었다. 이에 앞서 이현일의 문인이었던 김성탁(金聖鐸)은 상소를 올려 이현일의 신원을 청원하였다. 노론 세력은 즉각 김성탁을 처벌하자고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영해 인산서원에 대한 철폐를 건의하였다. 그 결과 영조는 인산서원을 철폐하고, 서원을 건립할 때 이를 묵인한 지방관을 파직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정부에서 철폐 지시가 내려지자, 영해를 중심으로 한 영남의 유림들은 일단 인산서원 사당을 철거하였다. 마침 건물이 자주 침수되어 이전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후일을 도모한 것이다.
1738년 영남 유림들은 영해도호부 북쪽 항리(項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사천리]에 다시 인산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1741년 전국적인 서원훼철령이 내려짐에 따라 다시 철폐되었다. 1774년(영조 50) 인산서원을 재차 설립하였으나 곧바로 철폐되었다.
[형태]
존립 당시 경내 건물로는 묘우인 상현사(尙賢祠)를 비롯하여 강당·동재·서재·삼문·주사(廚舍) 등이 있었다.
[현황]
철폐 후 현재까지 복설되지 않았다. 다만 재령이씨 존재파 종택에 『인산록(仁山錄)』이 전해져 인산서원의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인산록』은 1책의 필사본으로 건립 때부터 훼철 때까지의 전말과 이와 관련된 봉안문·상량문·고유문·통문 등을 수록해 놓았다.
[의의와 평가]
인산서원의 존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영남 지역 남인의 동향을 잘 보여준다. 제향자 이현일은 당시 퇴계학파의 도통을 계승한 인사로 추앙되었으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명의죄인’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따라 퇴계학파 및 남인 세력들은 노론 당국자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인산서원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