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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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次寧海府客舍韻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권미숙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298년 - 이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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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351년 - 이곡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364년 - 「차영해부객사운」『가정집』에 수록, 간행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62년 - 『가정집』 중간(重刊) |
편찬|간행 시기/일시 | 2002년 - 「차영해부객사운」 영덕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영덕군지』에 수록 |
배경 지역 | 이곡 묘소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10-1 |
배경 지역 | 가정 목은 양 선생 유허비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24-49 |
성격 | 문학 작품|한시 |
작가 | 이곡 |
[정의]
고려 후기에 이곡이 영해부 객사에서 지은 시.
[개설]
고려 후기 문신인 이곡(李穀)[1298~1351]이 영해부(寧海府) 객사(客舍)에서 지은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이곡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본래 고향은 한산이지만, 영해의 대현(大賢)인 김택(金澤)의 딸 함창김씨(咸昌金氏)와 혼인하였다. 이곡은 영해에 머물며 이색(李穡)[1328~1396]을 비롯해 1남 4녀를 두었으며, 지역과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구성]
영해부 객사에서 누군가 먼저 지어놓았던 시의 운자를 따서 칠언율시로 이곡 자신의 심정을 읊었다.
[내용]
감장주금탁구양(敢將晝錦託歐陽)[감히 주금을 가지고 구양에게 부탁하랴]
종득귀래거우망(縱得歸來去又忙)[돌아오긴 했어도 바삐 또 가야 하는 걸]
촉군전구간부노(蜀郡前驅看負弩)[촉군에서는 부노 전구의 광경을 보았고]
회계제도신요장(會稽除道哂腰章)[회계에서는 요장 제도의 옛일을 웃었지]
북헌천활창명흑(北軒天闊滄溟黑)[북쪽 누대는 탁 트인 시야에 검푸른 바다요]
서령추심초수황(西嶺秋深草樹黃)[서쪽 고개는 깊은 가을 누렇게 물든 초목이라]
휴향리정선쇄루(休向離亭先洒淚)[이별하는 정자에서 먼저 눈물 뿌리지 마오]
감시회구이무장(感時懷舊已無腸)[감회에 젖어서 애가 다 닳아 없어졌으니까]
이곡은 20세에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했으나 가난하고 문벌이 없는 집안이었기에 궁한 처지로 지내다가 36세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곧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제과(制科)에 등제(登第)하여 원나라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 검열관(檢閱官)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1348년에 귀국하여 관동 지역을 유람하는 기회가 있어 처가가 있는 영해에 들러 객사에 걸려 있던 시에서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가 바로 「차영해부객사운(次寧海府客舍韻)」이다. 이 시는 중국에서 자신이 입신출세한 것을 전반부에 은연중에 드러내 보이면서도, 후반부에서는 제2의 고향인 영해의 검푸른 바다와 누렇게 물든 초목을 바라보고 영덕에서의 짧은 만남과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곡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중국의 인사들과 교류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7언 율시로 된 이 시의 전반부에는 중국의 구양수, 사마상여, 주매신의 고사를 인용해서 자신의 입신출세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특징]
이곡은 평소 부지런하면 군자가 되고 게으르면 소인이 된다는 지론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인물이다. 시골 향리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불우하게 자라났으나, 부지런히 노력해 대단한 위치에 올랐다. 고려의 과거를 거친 다음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원의 대도(大都)[수도]에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시문을 남겼고, 학문과 문장 또한 뛰어나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고려와 원나라 양국을 오가며, 고려의 어려운 상황을 원에 알려 원의 수탈을 완화시키는 데 전념을 다하였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였다. 「시사설(市肆說)」에서는, 시장에서 개나 돼지만도 못할 짓들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일들을 징계하고 빨리 없어지도록 조처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증정참군서(贈鄭參軍序)」에서는 변란이 거듭되자 사람이 지켜야 하는 도리는 모두 없어지고 이익만 노리는데, 부자는 땅을 겸병(兼倂)하고 아전들은 무엇이든 빼앗아 농사짓는 백성의 집은 텅텅 비었다고 하였다. 이곡은 「기행일수증청주참군(紀行一首贈淸州參軍)」이라는 시를 지어 벼슬을 맡아 지방으로 가는 사람에게 그 지역의 실정을 알고 직무를 잘 수행하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곡의 문학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는 고려가 안팎으로 위기를 맞이한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 고심의 산물이다. 이곡이 남긴 『가정집(稼亭集)』의 글은 문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대다수의 많은 기문(記文)들이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의의와 평가]
이곡과 영덕의 인연은 이곡이 외가인 전예부(典禮府)[지금의 울산]와 가까운 영해 지방을 왕래하며 독서를 하면서부터였다. 이때 괴시리에는 후일 광정대부도첨(匡靖大夫都僉)의 찬성사(贊成事)로 봉해진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이 침향정을 새로 지어 살고 있었다. 이곡이 복주(福州)[지금의 안동] 관서의 사록참군사직 (司錄參軍事職)에 있을 때 예전에 영해 지방을 왕래하였던 인연으로 괴시리의 김택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1328년 5월 신미일, 이곡이 문과에 급제한 후 8년이 지난 31세에 영덕군 영해에서 이색을 낳았다. 이곡은 다른 지역에 살면서도 내내 영해를 그리워하였는데, 특히 그 마음을 담아 영해와 관련된 시를 많이 지었다. 「영해무가정차김간재시운(寧海無價亭次金簡齋時韻)」 1수와 「차영해북양루시운(次寧海北凉樓詩韻)」, 「차영해부객사운(次寧海府客舍韻)」 각 1수가 있으며, 기문으로는 「영해부신작소학기(寧海府新作小學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