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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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對立-葛藤-互惠-循環-發展-盈德-儒敎文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덕과 영해 지역 유교문화의 전개 양상과 관련된 이야기.
[영덕·영해 지역 재지사족의 성장]
조선시대 영덕현(盈德縣)과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는 고려 이래로 동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궁마지향(弓馬之鄕)’으로 일컬을 만큼 무향(武鄕)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여말선초에는 영덕·영해 지역에서 무과 급제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영덕·영해 지역에 정착한 주요 가문의 입향조(入鄕祖)나 현조(顯祖)들 가운데 무관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무(武)’를 숭상하는 영덕·영해 지역에도 일찍부터 유학이 전래되어 문풍(文風)이 진작되었다. 영해도호부의 사록(司錄)으로 부임한 역동(易東) 우탁(禹倬)[1263~1342], 호지말의 함창김씨(咸昌金氏) 가문에 장가든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부자, 공민왕의 세자 사부가 된 대흥백씨(大興白氏)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1303~1374], 영해에서 귀양살이를 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등이 고려 말 영해 지역과 인연을 맺고 유학을 전파하였다.
또한, 영덕·영해는 동해안의 요새로서 일찍이 방어사 등 외관이 설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직접적인 피해를 적게 입었다. 특히 영해는 해읍(海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연 환경적 조건과 학문적 전통으로 조선 후기 재지사족(在地士族)[조선 시대 향촌 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 계층을 이르던 말]이 폭넓게 존재하였다. 15세기 초 왜구의 종식과 함께 중앙 정계에서의 세조 왕위 찬탈과 사화(士禍) 등 빈번한 정변에서 연루된 기성 사족의 이주가 많아졌다. 조선후기 영해와 영덕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은 대부분 이주 사족이었다. 이들 가문은 대체로 여말선초 재경관인에서 영덕·영해 지역 토성 등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왕조 교체기와 정치적 격변기에 외향과 처향을 따라 낙향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 재지사족들은 상호 중첩적인 혼인관계와 학문적인 사우연원 관계 그리고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통해 지배 집단으로서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덕·영해 지역의 문풍은 조선 중기 이후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에 진력하여 다수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명성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퇴계학을 영해에 전파한 인물로는 퇴계의 제자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1520~1588]를 들 수 있다. 김언기는 영해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백인국(白仁國)[1530~1613], 백현룡(白見龍)[1543~1622], 남의록(南義祿)[1551~1620], 박의장(朴毅長)[1555~1615] 등에게 유학을 전수하고 영해의 사족들을 퇴계 문하로 연결하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또한 인접한 영덕으로도 이주하여 학문적·혈연적 외연을 확대하였다. 대표적으로 영덕 양원(陽源)으로 이주한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있다. 영해에서 영덕 양원[지품면 신양리]으로 이주한 회암(悔菴) 남유의(南有義)는 그의 아들 둔와(遯窩) 남국신(南鞠臣)[1558~1634]이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아들 남승길(南承吉)·남승정(南承鄭)·남승필(南承弼) 삼형제가 임란 당시 화왕산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면서 17세기 이래로 영덕의 대표적 사족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영덕·영해 지역의 유학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더욱 성숙된다. 17세기 영덕·영해에서는 토착 성씨들이 점차 퇴조하고, 재령이씨(載寧李氏)·무안박씨(務安朴氏)·영양남씨(英陽南氏)·대흥백씨(大興白氏)·안동권씨(安東權氏) 등 새로이 이주해온 사족들이 강력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정치·사회적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 가문은 안동권과 영해·영덕 지역 가문과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는 동시에 집성촌을 이루어 동해안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유수한 반촌을 형성·발전시켰다. 특히 이 시기 영해사족으로 중앙정계와 영남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인물은 숙종조 ‘산림(山林)’으로 영남 남인을 대표하였던 이현일(李玄逸)과 퇴계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로 평가되는 이현일의 형 이휘일(李徽逸)이다. 이휘일과 이현일 그의 아들 이재(李栽)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자로 평가받았고 또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영해 지역 재지사족들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결과 영해는 ‘소안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향촌지배 구조의 확립 - 유향소·향약·서원]
영해의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16세기부터 그들 중심의 향촌 지배를 위해 각종 조직과 규약을 정비해 나갔는데, 유향소(留鄕所)·향약(鄕約)·동약(洞約) 및 향교·서원·정사 등등은 그 중요한 장치였다. 이들 재지 세력은 17세기 이전까지는 향교를 중심으로 향촌사회를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해향교도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17세기 후반 이후 점차 쇠퇴하여 갔다. 이러한 향교의 교육 부진은 사학인 서원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특히 17세기 이후가 되면 향촌사회에서의 사림의 활동에 서원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더 이상 서원 건립을 미룰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해의 재지사족들도 서원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영해 지역 최초로 단산서원(丹山書院)이 1608년(선조 41) 건립되었다. 단산서원은 여타 서원과 마찬가지로 영해 지역 사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신활(申活)의 건의로 우탁(禹倬)만 제향 하였다가, 영해와 연고가 있는 이곡과 이색 부자를 추향하였다. 단산서원은 건립 이후 영해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향촌 사림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영덕에서는 1568년(선조 1)에 현령 정자(鄭磁)가 남강서원(南江書院)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묘우와 동·서재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21년(광해군 13) 묘우를 건립하여 이언적과 이황을 제향하면서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 영덕 지역 재지사족들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문중 의식의 확대와 맞물려서 향촌 내 입지와 활동 공간으로서 서원의 필요성이 커져 가자 각 문중들은 각기 자기 조상을 위주로 한 서원·사우·향사(鄕社)·정사(亭榭) 등의 건립을 모색해 나갔다.
『영덕군지』(2002)에 소개된 서원·사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덕현: 남강서원[이언적·이황], 신안서원[주자·송시열], 수정서사[신희·신종부·신규년], 세현사[김을진·김주린], 모현사[김재락·김세락]
영해부: 단산서원[우탁·이곡·이색], 구봉서원[정충사][백동현·박의장·박홍장], 인산서원[이휘일·이현일], 운산서원[백문보·백현룡], 운계서원[박제상·박세통·박응천], 대봉서원[권자신·권책·권상길], 인계서원[송시열], 도계정사(경현사)[박선·권경], 향현사[충렬사][박종문·정담], 미산정사[신활], 광산정사[남경훈·남길]
17세기 초반에 건립된 남강서원·신안서원·단산서원과 19세기에 건립된 인계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과 사우는 모두 영덕과 영해를 대표하는 가문들의 문중원사였다. 이러한 서원·사우를 건립하지 못한 가문에서는 정자와 정사, 재실을 세워 나갔다. 『영덕군지』에 소개된 영덕·영해의 누정과 재·정사는 모두 175개소로 이를 건립한 가문들과 거주지는 다음과 같다.
영해면: 괴시리[한산이씨, 영양남씨, 안동권씨], 원구리[대흥백씨·영양남씨·안동권씨·진성이씨·무안박씨], 묘곡리[담양전씨], 대리[영양남씨], 벌영리[무안박씨]
축산면: 칠성리[영양남씨], 도곡리[무안박씨], 상원리[대흥백씨], 축산리[신안주씨·일선김씨·평산신씨], 대곡리[대흥백씨·안동권씨·평산신씨], 기암리[수안김씨]
병곡면: 원황리[대흥백씨], 용암[영양남씨], 덕천리[안동권씨], 송천리[안동권씨], 보곡리[영해박씨], 금곡리[영천이씨], 삼읍리[김녕김씨], 영리[울진장씨], 아곡리[안동김씨], 사천리[선산김씨]
창수면: 인량리[재령이씨·영천이씨·대흥백씨·영양남씨·함양박씨·야성정씨], 신기리[진성이씨], 갈천리[안동권씨], 오촌리[재령이씨·영해신씨], 가산리[대흥백씨·영양남씨], 미곡리[평산신씨·안동권씨·김녕김씨], 삼계리[대흥백씨·함양박씨], 수리[대흥백씨·무안박씨], 신리[재령이씨], 보림리[무안박씨·재령이씨], 인천리[재령이씨],
영덕읍: 매정리[선산김씨·강릉박씨], 화천리[영양남씨], 구미리[평산신씨], 우곡리[평산신씨], 삼계리[문화류씨·평산신씨], 덕곡리[진주강씨]
지품면: 지품리[인동장씨·수안김씨], 신안리[평산신씨·기계유씨], 눌곡리[경주김씨], 신양리[영양남씨], 수암리[평산신씨], 오천리[분성배씨·밀양박씨], 삼화리[안동권씨], 도계리[김녕김씨], 율전리[연안차씨·경주최씨], 낙평리[전주최씨], 속곡리[파평윤씨], 송천리[수안김씨], 용덕리[풍천임씨]
강구면: 상직리[영천이씨], 금호리[평산신씨], 원직리[수안김씨·김녕김씨·고성이씨], 소월리[평산신씨]
달산면: 대지리[평산신씨·영천이씨], 인곡리[강릉유씨], 옥산리[파평윤씨], 주응리[경주최씨], 봉산리[영양남씨], 용평리[영천이씨·경주최씨], 매일리[영천이씨]
남정면: 회리[평산신씨], 도천리[경주이씨], 쟁암리[경주김씨], 사암리[밀양박씨], 중화리[영양남씨]
영덕·영해 지역 재지사족들은 향촌 운영 기구로서의 서원·사우 설립과 동시에 향약·동약 등 향촌에 관한 규약을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군현 단위의 향약보다는 촌락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동약(洞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영해에서 시행되었던 동계와 동약 등이 확인되고 있다. 영해에서 동약은 16세기 중엽에 제정되어 보급되어 갔는데, 17세기에도 계속 제정되었다. 이 동약은 단순히 상부상조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층민을 지배·통제한 재지사족의 촌락지배조직이었다. 이러한 동약의 성격은 무안박씨 박호(朴滈)[1624~?]가 작성한 영해 「정신동계안중수서(貞信洞稧案重修序)」에서도 확인된다. 이 계안 서문에 의하면 새로 동네에 들어온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전에는 없던 출동(黜洞), 고관치죄(告官治罪), 삭적(削籍), 손도(損徒) 등 권징(勸懲)의 도리를 규정하고 있다. 18세기 초에 중수되었다고 보이는 괴시동의 동약에서도 이러한 규정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동계·동약은 재지사족의 군현지배조직인 유향소·향안과 상호 보완적인 상하 관계를 가지면서 사족의 향촌 지배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집권 노론의 탄압으로 훼철된 인산서원]
인산서원은 갑술환국 이후 노론 측의 대남인 탄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1737년(영조 13)에 훼철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이현일의 제자인 김성탁의 「갈암신원소(葛庵伸寃疏)」였지만 실제로는 이전에 송시열·송준길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던 영남유소가 원인이었다. 양송(兩宋)의 승무(陞廡)는 1706년(숙종 32) 김장생(金長生) 승무 직후 전라도 유소에서 발단한 이래로 1756년에 승무될 때까지 이에 반대한 곳은 안동·상주권이 중심이 된 남인계 유림이었다. 특히 1735년 12월에 노론계 영남유생 조세부(曺世溥) 등과 채경침(蔡景沉) 등의 유소가 양송승무를 주청하자, 1736년 3월에 이인지(李麟至)를 소수로 한 안동·상주권을 비롯한 영남 남인계 유생 4천여 명이 연명한 반대 상소가 올라갔다. 이 유소로 인해 양송의 승무가 장기간 지연되었다. 이에 노론 측은 영남 내 노론계인 진사 신헌을 통해 양송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소를 올렸고, 이 소에서 이현일을 거론하고 나섰다. 이는 곧 영남남인에 대한 탄압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 상소가 있자 곧바로 이현일의 제자인 김성탁이 스승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는데, 이것이 노론과 영조를 자극하여 이를 계기로 김성탁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는 등 노론의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 인산서원의 훼철은 그 연장선에서 강행되었다. 그 결과 1737년 8월에 정언 민택수(閔宅洙)가 영해에 있는 이현일 서원의 훼철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인산서원의 훼철은 노론 측의 강력한 의지로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고 바로 시행되었다. 당시 노론의 입장에서는 자파의 집권 명분과 관련된 양송의 승무를 빠른 시간 내에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유일한 반대세력인 영남 남인계 유생들을 장기간 그대로 방치해 놓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노론 측은 남인들의 반대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그들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규정하였던 이현일을 지목하고 나섰으며, 그 연장선에서 인산서원의 훼철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인산서원 훼철을 포함한 이현일에 대한 탄압에는 영조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영조는 숙종조에 이현일과 남인이 원자와 다른 왕자와의 적서문제를 엄격히 구분할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냉대하였던 것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인산서원의 훼철은 이러한 노론과 영조의 이현일에 대한 탄압조치의 일환으로 단행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이현일 서원의 훼철이 확정되고 이에 관한 공식 관문이 도착하자 서원 임원들은 이현일의 위판 훼철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서원 훼철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주향자와 배향자를 분리하여 대처하는 것이 가능한 지를 모색하였다. 하나는 사당을 훼철하라는 명령이 내렸지만 인산서원은 이현일을 추배하기 전에 이미 주향자[이휘일]가 있는 독자적인 서원이었기 때문에 사당까지 훼철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의견은 앞의 주장이 옳기는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로 보아 화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당을 훼철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의논이 있게 된 것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관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서원명을 지목하지 않고 이현일 서원이라고만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 당시 서원터가 홍수에 자주 침수되어 서원에서 이미 이건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주향의 위판을 일시적으로 다른 곳에 옮겼다가 새로 서원을 창건하여 위판을 봉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서원 측에서는 이 의견에 따라 곧바로 이휘일의 위패를 성찰재(省察齋)에 임시로 옮긴 다음 이현일의 위판을 작은 궤짝에 넣어 서원 뒷산에 묻자 관에서 곧바로 사당을 훼철하였다.
서원 측이 당시 조정의 강경한 분위기 속에서도 훼철과 동시에 이건 문제를 논의 할 수 있었던 것은 영남사림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산서원 문제는 훼철 후 이건이라는 점에서 사실상의 서원 신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서원 측은 이번 신축은 주향자의 이설(移設)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지만, 감영에서는 서원 이설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없었다. 서원측은 감사의 답변과는 관계없이 곧바로 서원 이건을 추진하였다. 당시 이 문제는 영해유림뿐만 아니라 이현일·이재의 문도들이 집중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안동권 유림들의 절대적인 관심사였다. 당초 서원 측에서 훼철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은 노론과 영조의 단호한 의지로 볼 때 이를 피할 수 없고, 서원을 이건하여 주향자[이휘일]만 배향한다면 서원의 존립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산서원은 이설한 지 4년 만인 1741년에 전국적인 훼철령에 의해 다시 훼철되었다. 이때의 원사훼철은 1714년에서 1741년까지 사사로이 건립된 서원 173개소를 일절 훼철하였는데, 인산서원도 포함되었다. 당시 훼철을 피할 뚜렷한 대책이 없는 가운데 본가에서 훼철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를 고집하여 논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훼철령이 영조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일절 예외 없이 철저히 시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인산서원이 훼철 대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결국, 1741년 11월 12일에 훼철 책임자가 파견되었고, 인산서원 측은 1737년 훼철 때의 예에 따라 13일에 사당에 고유한 뒤 위판을 묻었다.
[신분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 – 1840년 경자향전]
18세기 이후 영남지역에서는 이른바 ‘신향(新鄕)’의 등장으로 인한 신분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하였다. 영해에서는 1840년(헌종 6) 향교의 석전례(釋奠禮) 주관을 두고 신·구향간의 심각한 향전이 일어났다. 이 향전을 주도하였던 영해 지역 신향 세력은 서얼이었다. 영해 지역을 대표하는 각 가문에는 대부분 서파(庶派)가 번성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해의 신향들은 적파(嫡派) 인근에 독자적인 세거지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신향들은 영남의 여타 지역의 서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론을 표방하면서, 관의 지원을 받아 노론계 서원인 인계서원(仁溪書院)을 세워 세력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이 향전은 1839년(헌종 5) 신임부사 최명현(崔命顯)이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신향의 박기빈(朴基贇), 남효익(南孝翼), 권도익(權度益) 등은 부사의 책실(冊室)이며, 신향 권치기(權致基)의 인척인 진보의 최생(崔生)을 통하여 부사와 인연을 맺었다. 또한 신향들이 추천한 신향의 향원(鄕員) 한명을 인계서원(仁溪書院)의 원장으로 추천하여 승인을 받는 등 향내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1840년 7월에는 부사로 하여금 인계서원을 방문하게 하는 등 부사와의 유대 관계를 다져나가며 신향들의 위세를 증대하여 나갔다.
그런 가운데 1840년 8월의 석전례에 교임(校任)이 기존의 관례에 따라 석전의 헌관(獻官)을 부사에게 망보(望報)하자, 부사는 이를 물리치고 인계서원의 유생 중에서 헌관과 집사를 선임하도록 하였다. 구향이 중심이 된 향교측은 부사의 조치가 이전에도 없는 무례한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간주하여 반발하였다. 이에 부사가 도약정(都約正)과 도유사(都有司)를 제명하고, 체포령을 내리는 한편, 신향인 권치기를 수별감(首別監)에 임명하자 구향인 좌수 주형렬(朱亨烈)과 별감 정상희(鄭象羲)가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부사가 신향인 박기빈을 좌수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구향들은 안동 호계서원·의성·군위·영양 등지의 교원에 통문을 돌려 실상을 알리는 한편, 감영에도 전말을 고하였다. 이에 격분한 부사는 구향의 지도자격인 7명을 잡아들여 관문에서 소란을 피운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면서 곤장을 쳤다. 구향들은 다시 고변장(告變狀)을 감영에 보내고, 감영에서는 잡힌 사람들을 영덕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영덕현령 이장우(李章愚)가 이 사건을 재차 조사하여 이번 사건을 단순히 신구향간의 ‘쟁임(爭任)사건’으로 규정하여 조사하였다. 따라서 영덕현령의 보고에 의하여 감사는 향전을 쟁임지사(爭任之事)로 규정하고, 신·구향 모두를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사건으로 영해부사 최명현은 봉고파직(封庫罷職)되었으며, 향임과 교임은 다시 구향으로 차출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기존의 사족 지배 체제는 근본적으로 해체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