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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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宗源 |
영어공식명칭 | An Jong-won |
이칭/별칭 | 사청(嗣淸),쌍청당(雙淸堂),문간(文簡),흥녕군(興寧君),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안종원(安宗源)[1325~1394]은 문과 급제 후 양광도안렴사, 전법총랑, 판삼사사 등을 지냈다. 조선왕조 개창 후에는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었다.
[가계]
안종원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할아버지는 안석(安碩)인데 현리로 있으면서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첨의찬성사를 지낸 안축(安軸)[1282~1348], 어머니는 검교군기감을 지낸 문귀(文龜)의 딸 감천문씨(甘泉文氏)이며, 부인은 우상시를 지낸 김휘남(金輝南)의 딸이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집현관제학을 지낸 안중온(安中溫), 서북면도순문사를 지낸 안경량(安景良)[?~1398], 조선 개국공신이며 대사헌을 지낸 안경공(安景恭)[1347~1421], 공조전서 안경검(安景儉)이며, 사위는 류후(柳厚)이다. 아들의 현달로 부인 김씨는 경녕택주(慶寧宅主)에 봉해졌다.
[활동 사항]
안종원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1342년 전교교감, 1345년(충목왕 1) 전교시교감, 1346년 수찬, 봉공에 임명되었다. 이때 안종원은 임기가 차서 승진해야 했지만,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았던 동료 심동로(沈東老)[1310~?]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1347년 삼사도사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유비창부사, 사복승, 공조령 등을 지냈다. 안종원은 1351년(공민왕 즉위년) 도관좌랑, 1352년 군부좌랑, 1353년 전법좌랑, 1354년 경상도안렴사, 판도사를 거쳐, 1355년 군부정랑으로 여흥에 부임하게 되었으나, 어머니 상을 당해 나아가지 못하였다. 1356년 전중지어사로 있으면서 기황후(奇皇后)를 믿고 전횡을 일삼던 기씨 일족들을 처결하였다. 1357년 지제교, 예부낭중, 1358년 이부낭중, 1360년 시어사를 거쳐, 1361년 양광도안렴사로 나아갔다. 1361년 겨울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안종원이 충주에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후 공민왕이 음죽에 이르렀을 때, 관리와 백성들이 다 도망가서 대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문책을 당해 지청풍군사로 좌천되었다.
안종원은 1363년(공민왕 12) 도관총랑에 올랐고, 1364년 전법총랑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권력을 잡고 있던 신돈(辛旽)[?~1371]에게 참소를 당해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부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371년 신돈이 처단되자 바로 사헌시사가 되어 복귀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 환관의 폐단을 개혁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1375년 성균대사성 판종부시사를 거쳐, 1376년 대사헌, 밀직제학, 밀직부사에 올랐다. 이 무렵 신돈의 첩 반야(般若)가 태후 궁에 몰래 들어와 우왕이 자신의 자식임을 주장하자, 이인임(李仁任)[?~1388]이 반야를 옥에 가두었다가 임진강에 던져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안종원은 궁중 출입을 제대로 관할하지 못한 환관 김현(金玄)을 탄핵하여 회덕현으로 유배 보냈다.
안종원은 1378년(우왕 4) 첨서, 1379년 판숭경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 흥녕군(興寧君)에 책봉되었다. 1380년 상의정당 겸 대사헌으로 임명되었고, 1381년에는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에 녹훈된 후 문하평리 대사헌에 올랐다. 1382년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에 녹훈되었다. 1381년 여름 지공거로 과거를 주관하였다. 1386년(우왕 12) 정당문학에 임명되었지만, 1387년 파직당하였다. 1388년 정권을 잡게 된 시중 최영(崔瑩)[1316~1388]은 안종원에게 문하찬성사 판전공을 맡기고, 인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어 상의, 판후덕부사, 예문관대제학, 판상서시사를 지냈다. 1389년에는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예문관대제학 감춘추에 임명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 대우문 영서운관사를 거쳐, 1391년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안종원은 1392년(태조 1) 새 왕조가 개창되자, 조정의 원로로서 영삼사사에 올랐다. 1393년 새 도읍을 정하기 위해 계룡산의 지세를 살펴볼 때, 안종원도 함께 수행하였다. 개국에 공이 있다 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경성수축도감판사와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었다. 1394년 사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지만, 연산참에서 요동부사가 저지하여 귀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안종원은 세상을 떠난 후 ‘문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991년 계담서원(桂潭書院)[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