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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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友益 |
영어공식명칭 | Kim U-ik |
이칭/별칭 | 택지(擇之),두암(斗巖),금학헌(琴鶴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71년 - 김우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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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김우익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김우익 황해도도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김우익 영원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김우익 한성부서윤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김우익 해미현감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39년 - 김우익 사망 |
거주|이주지 | 김우익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
부임|활동지 | 김우익 부임지 - 평안남도 영원군 |
부임|활동지 | 김우익 부임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
묘소|단소 | 김우익 묘소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선성(宣城) |
대표 관직 | 황해도도사|한성부서윤|해미현감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우익(金友益)[1571~1639]은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도사, 한성부서윤, 해미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가계]
김우익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택지(擇之), 호는 두암(斗巖), 금학헌(琴鶴軒)이다. 아버지는 사섬시첨정을 지낸 김윤의(金允誼), 어머니는 충의위 조양(趙諒)의 딸 숙인 한양조씨(漢陽趙氏), 할아버지는 사섬시첨정을 지낸 김택민(金澤民), 증조할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김좌(金佐)이다. 부인은 생원 김윤흠(金允欽)의 딸 숙인 순천김씨(順天金氏)이다.
[활동 사항]
김우익은 어린 시절 권우(權宇)[1552~1590]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으로 세상이 혼란한 가운데 아버지 김윤의가 돌림병에 걸려 위독하였다. 김우익은 직접 아버지의 변을 맛보면서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결국 상을 당하고 말았다.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 매일 성묘했다고 한다.
김우익은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거산도찰방에 부임하였다. 1616년에는 황해도도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무렵 전임 황해도관찰사 최기의 옥사가 일어났다. 최기의 옥사는 권신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이었던 최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황해도관찰사 백대형(白大珩)[1575~1623]을 사주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최기의 옥사로 황해도에 살고 있던 많은 인사가 화를 입게 되었는데, 김우익이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여 많은 사람을 구하였다. 1617년 호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1617년 영원군수로 부임하였다. 영원군은 쇠락한 고을이었는데, 김우익이 부지런히 다스리니 여러 해 동안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고 고을 창고도 넉넉해져 관찰사가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김우익은 1623년(인조 1) 이후에는 진주와 안동의 제독관이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김우익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638년(인조 16) 한성부서윤을 거쳐 해미현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물러났다. 김우익이 해미현을 다스릴 때 치적이 있어 백성들이 김우익의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김우익은 1639년(인조 17)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 판서 남이공(南以恭)[1565~1640]이 20여 년 전 김우익이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많은 사람을 구원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발탁하려 했지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묘소]
김우익의 묘소는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수곡(樹谷)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