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38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in 1592~1598)
이칭/별칭 임란,임진조국전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소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시작
전개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정유재란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조선|일본|명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의 침략으로 영주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처음에는 조선과 일본 간 전쟁이었으나,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국제 전쟁으로 확산되었고, 나아가 16~17세기 삼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죽령(竹嶺)이 있는 영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에 조선 정부는 관군과 의병을 통해 죽령 수호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영주 지역 사림과 백성들은 의병을 일으켜 국토 수호에 앞장섰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사림파의 분열로 붕당이 시작되었다. 동인과 서인 간 붕당은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계기로 더욱 격화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전쟁의 기미를 살피러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의 보고는 당색에 따라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군사적으로는 200년간 지속된 평화로 인해 군국기무(軍國機務)가 허약해진 상태에서, 방군수포(放軍收布) 관행과 피역(避役) 현상의 증가는 실질적인 군액의 감소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약 1세기 동안 진행된 전국시대의 혼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에 의해 평정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직후 내부적 불안요소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침략을 준비하게 된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17만여 명 육군과 3~4만 명 수군을 동원하여 부산을 침입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전란 초기 왜군은 중로·좌로·우로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이에 1592년 4월 21일 대구, 1592년 4월 24일 상주, 1592년 4월 26일에는 문경이 차례대로 점령되었으며, 개전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었다. 그리고 1592년 6월 17일 평양까지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왜군은 1592년 5월 중순 이후 경상도 북부 방면에 약 3만 명 병사를 배치하고, 조령을 통한 후방 보급선과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 무렵 영주 지역은 왜군의 침입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죽령이 있었기에 다른 지역과 비교해 비교적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이와 관련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 6월 28일 기사에 “왜적은 평소에 죽령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길로 경유하지 않았다. 안동에 주둔했던 적은 우도(右道)에서 올 때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지 않았고, 얼마 있다가 철수하여 되돌아갔기 때문에 죽령 아래의 풍기·영천·예안·봉화와 그 남쪽의 청송·진보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兵火)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복지(福地)라고 일컬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국란을 당하여 영주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고자,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전란 초기 영주 지역 의병활동에서 주목할 인물은 김륵(金玏)이다. 김륵은 영주 출신으로 전란 초기 경상좌도안집사로 임명되어 영주 지역의 전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당시 보고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가 영천과 풍기 지역에는 마을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1592년 5월부터 김륵은 충의(忠義)를 격려하는 포고문을 작성해, 고을마다 하달하는 등 의병 창의를 권유하였다. 당시 조정은 죽령 방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죽령이 청풍·충주와 연결되고, 다른 길로는 제천·원주와 연결되어 만약 죽령을 넘겨 줄 경우 경상도 북부 지역의 조선군이 경상좌도 및 충청도 지역에 주둔한 왜군에 협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주 등지에서 창의한 의병의 힘을 빌려 죽령 지역 방어를 도모하였다.

전란 초기 김륵의 권유로 피신 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적극적인 모병 활동으로 영주에서도 많은 의병이 창의하였다. 이 무렵 영주 지역에서 조직된 의병부대의 대장은 김개국(金蓋國)이었다. 김개국을 중심으로 이흥문(李興門)이 부장을 맡았으며, 김대현(金大賢)은 백성들의 진제(賑濟)에 힘썼다. 또 박녹(朴漉)·금복고(琴復古)·김륭(金隆) 등이 참모, 박선장(朴善張)과 권호신(權虎臣) 등이 사서·사병·사량, 장여홍(張汝弘)·장여기(張汝起)·이성백(李成栢) 등이 각 진영과 척후의 장을 맡았다. 당시 김개국 부대는 향리(鄕里)의 이점을 살린 유격전 및 매복전을 전개하며 왜군의 죽령 진출을 방어하였다. 그 외에도 영주 출신 인사로는 이개립(李介立)·안몽윤(安夢尹)·이정견(李庭堅)·곽진(郭瑨)·권두문(權斗文)·권유선(權有善)·손흥경(孫興慶)·배응경(裵應褧)·성안의(成安義)·황응규(黃應奎)·임흘(任屹)·곽수지(郭守智) 등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영주 출신 곽수지는 『호재진사일록(浩齋辰巳日錄)』을 남기기도 했다. 『호재진사일록』은 1592년 4월 17일부터 1598년 9월 3일까지 곽수지가 의병 활동을 전개하며 쓴 진중일기로 당시 영주 지역의 상황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호재진사일록』에 따르면 1592년 4월 20일 영주 지역 백성들은 왜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대거 소백산으로 피신했는데, 갑자기 몰려든 피난민들과 소백산 소재 사찰의 승려들 간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왜군 소식이 잠잠해지면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가고, 왜군 소식이 들리면 소백산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는데, 1592년 5월 무렵부터 선비들이 의병을 조직하게 되면서 안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호재진사일록』에 따르면 풍기 지역 의병들은 주로 죽령에 매복해 있다가 적을 공격하는 전술을 세웠지만, 상주·영천(永川)·안동 등에 있던 왜군이 죽령을 넘지 않음으로써,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앞서 언급한 전란 초기 영주 지역 전황과 일맥상통한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어려웠던 전황은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 명나라 참전 등으로 서서히 역전되어 갔다. 1593년 이후 왜군은 경상도 남부로 퇴각하였고, 명나라와 강화 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흩어졌던 영주 지역의 백성들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와 황폐해진 고장을 복구해 나갔다. 또 의병을 일으켰던 사림들은 군공을 인정받아 관직에 제수되어, 관군으로 활약하게 된다.

[결과]

1598년 11월 치러진 노량해전(露梁海戰)을 끝으로 임진왜란은 끝이 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은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지만, 왜군에 맞서 많은 의병이 일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비록 영주 지역은 왜군의 직접적인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이 기간 고장 수호를 위해 많은 인사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영주 출신 의병 가운데서는 이개립·이정견·금복고·김개국 등이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주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병이 일어나 국토와 고장을 지키겠다는 우국충정으로 왜군과 맞서 싸웠다. 그 결과, 후방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임진왜란 극복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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