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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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儒漢遺跡址 |
영어공식명칭 | Hong Yuhan’s Relics |
이칭/별칭 | 홍유한 고택지,홍유한 유택지,홍유한 선생 유적지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로 247[구구리 322-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창근 |
소재지 | 홍유한 유적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로 247[구구리 3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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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천주교 유적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에 있는 영조·정조대 활동했던 한국 천주교 최초 수덕자 홍유한의 유적지.
[개설]
홍유한 유적지(洪儒漢遺跡址)는 한국 천주교 최초 수덕자인 홍유한[1736~1785]이 1784년(정조 8) 창립된 한국 천주교회보다 30여 년 앞서 신앙을 받아들였던 곳이다. 홍유한은 1775년(영조 51)부터 1785년(정조 9)까지 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에서 홀로 천주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천]
홍유한은 서울에서 태어나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익은 1750년경부터 제자들과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칠극(七克)』·『직방외기(職方外紀)』 등 서학을 연구하였는데, 홍유한은 천주교를 단순히 신학문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접근하였다. 문중과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서울을 떠나 충청도 예산에 기거하면서 천주교에 관해 연구하였다.
1775년 순흥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단산 구구리로 거처를 옮겨 『천주실의』와 『칠극』에 따른 수계 생활을 홀로 시작하였다. 7일마다 하루를 주일로 정해 세속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정절의 덕을 실천하였으며, 금육일을 알지 못하여 언제나 좋은 음식은 먹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비록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주일과 재를 지키며 신앙인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1785년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주에서 천주교 수덕 및 기도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위치]
단산면행정복지센터 정문에서 옥대삼거리와 회석교를 지나 단산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4㎞ 이동하면 ‘홍유한 선생 유적지’ 표지판이 나온다. ‘홍유한 선생 유적지’ 표지판을 따라 구구교를 건너 약 2.5㎞ 이동하면 왼쪽에 홍유한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현황]
홍유한 유적지에는 1722년(경종 2)에 효자로 정려(旌閭)된 홍유한의 조부 홍중명의 효자문 현판과 홍유한의 신앙생활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27일 건립된 홍유한의 유적비 등이 남아있다. 홍유한의 유적비 전면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선생 유적지(韓國天主敎會最初修德者豊山洪公儒漢先生遺跡址)’라고 새겨져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홍유한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유적관리 상태는 양호하지 못하다. 이에 영주시에서는 홍유한 유적지에 대한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문화재 지정도 추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홍유한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천주교를 단순히 신학문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로 대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밀알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홍유한 유적지는 홍유한의 수계 생활공간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