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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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信塔 |
영어공식명칭 | Musintap(Folkta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 「무신탑」 『영주시사』2에 「무신탑」으로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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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무신탑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관련 지명 | 서귀대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성격 | 설화|사물전설|인물담 |
주요 등장 인물 | 소지왕|파로|벽화|노파|정습인|신돈 |
모티프 유형 | 왕의 자질|신의|무신|기다림|원망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 있었던 무신탑과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무신탑」은 가흥동에 있었다고 전하는 무신탑(無信塔)의 내력에 대한 사물 전설이면서, 소지왕(炤知王)에 얽힌 인물 전설이기도 하다.
[채록/수집 상황]
2010년 영주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영주시사』2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영주시 가흥동의 서귀대(西龜臺) 위에 무신탑이 있었는데, 그 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때 소지왕이 내기군(奈己郡)[지금의 영주]에 행차를 하자, 왕을 맞이하려는 인파가 고을에 가득했다. 이때 고을에 사는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16세 되는 딸 벽화(碧花)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그녀를 비단으로 덮어서 수레에 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인 줄 알고 열어 보았다가 뜻밖에 소녀의 모습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아리따운 벽화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서라벌 궁중으로 돌아가서도 소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왕은 벽화를 만나기 위해 미복(微服) 차림으로 400여 리 길을 달려 내기 고을을 다녀갔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소지왕이 또 벽화를 만나러 내기 고을로 가던 중 고타야(古陀耶)[지금의 안동]를 지나다가 어느 노파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민심이 궁금했던 왕이 노파에게 지금 임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노파는 “세상 사람들이 지금 임금님을 성인이라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임금님의 지위로 한낱 여자를 잊지 못하여 걸핏하면 몰래 내기 고을에 왕래하시곤 합니다. 이는 용이 고기로 변하여 어부에게 잡힌 격이라 할 것이며 지존의 몸으로 매우 신중치 못한 처신입니다. 이런 분을 성인이라 한다면 성인 아닐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이 말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고 다시는 내기 고을에 걸음을 하지 못했다. 소지왕은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벽화는 아기를 낳았다. 영문도 모른 채 왕을 기다리던 벽화는 마침내 왕의 무신함을 원망하여 서귀대 위에 탑을 쌓아 이름을 ‘무신탑’이라고 했다. 공민왕 때 지군(知郡)[군수] 정습인(鄭習仁)이 “나쁜 나무[惡木] 밑에서 쉬지 않으며 도적 샘물[盜泉, 중국 산둥성 사수현에 있는 샘물로 이름이 나쁘다 하여 공자가 마시지 않았다고 함]은 마시지 않는다 함은 그 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인데, 고을 앞 높은 자리에 우뚝 솟아 온 고을이 쳐다보는 탑 이름이 ‘무신(無信)’이어서야 쓰겠는가?”라고 하며 그 탑을 헐어버리게 하고, 그 기와로 빈관(儐館)을 수리했다고 한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지군 정습인을 옥에 가두어 죽이려 했는데, 조관(朝官)들의 구원으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한다.
[모티프 분석]
「무신탑」의 주요 모티프는 왕의 자질, 신의, 무신, 기다림, 원망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자질과 함께 신분의 고하를 떠나 신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함께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