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54
한자 乙未義兵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엄찬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 1월 17일연표보기 - 을미의병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서 의병 봉기
발단 시기/일시 1895년 - 을미의병 민비 시해 사건 발생 및 단발령
전개 시기/일시 1896년 2월 7일 - 을미의병 강원도 영월군 관풍헌에서 호좌창의진 결성
발생|시작 장소 관풍헌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중앙로 61[영흥리 984-1]지도보기
성격 의병
관련 인물/단체 유인석|호좌의진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

[개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친일 개화파 정권을 내세워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와중에 민비(閔妃)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강행하는 등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의 의도를 드러내자 위정척사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위정척사의 거두 이항로의 제자였던 유인석(柳麟錫)은 강원도 영월군에서 문인 제자들을 모아 호좌창의진을 결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을미의병(乙未義兵)은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촉발되어 일어난 의병을 말한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한국에 출병하여 갑오변란(甲午變亂)을 야기하고, 이어 조선의 내정 개혁을 급진적으로 강행하였다. 이에 유생들은 당시 정부가 단행한 갑오개혁을 대변혁으로 단정하였다. 특히 1894년의 갑오변복령(甲午變服令)이 있은 후 1895년 초 을미변복령(乙未變服令) 공포로 의병 봉기의 분위기가 이미 성숙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친청파 민비의 세력이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러 내각을 조직하는 동시에 친일 내각의 정책을 중단하는 데 이르자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만회하기 위하여 1895년 10월 8일 대궐을 침범하여 반일·친러 세력의 배후인 민비를 시해하였다. 이어 이틀 후에는 민비가 국정에 간섭하여 정치를 어지럽혔다는 허물까지 씌워 고종으로 하여금 폐위 조칙까지 발표하게 하였다.

[경과]

을미의병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서 확대되는 계기는 단발령 실시였다. 을미사변 직후 친일 내각이 성립되자 그간에 중단되었던 개혁[갑오개혁]을 계속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을미개혁을 단행하였다. 연호를 세워 1896년[을미년] 11월 17일을 건양 원년 1월 1일로 개정하고 이틀 전에 단발령을 공포(公布)하였다. 그리고 친일 내각에서는 1896년 11월 15일 밤 고종과 태자를 위협하여 단발케 하는 동시에 각지에 사람을 보내 강제로 사민(士民)의 상투를 자르게 하였다.

유인석은 단발령에 대하여 우리의 문화를 오랑캐 문화로 변질시키는 문화적 망국 행위로 판단하면서 “이제 성토하다 죽고 거의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선비의 의리이다.”라며 거의를 촉구하였다. 1896년 당시 유인석은 1893년 3월 유중교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유업을 잇기 위하여 1895년 음력 5월 향리인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으로 이사하였다.

유인석은 장담서사(長潭書社)를 짓고 화서학파의 도맥을 계승·보존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강회(講會)를 열어 유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강회는 규모의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으나 대개 10일 간격으로 정기적인 행사가 치러졌다. 여기에 참가한 인사들은 모두가 화서학파에 연원한 유중교 문하의 인물들로서, 강회에 참가한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후일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을미사변 직후의 긴박한 처지에서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인석은 선비로서 환란에 대처할 세 가지 방안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첫째, 거의소청(擧義掃淸)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갚는다. 둘째, 거지수구(去之守舊)는 고국을 떠나서 옛 것을 지킨다. 셋째, 자정치명(自靖致命)은 조용히 자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친다.

그리하여 화서학파 유생들을 중심으로 1896년 1월 12일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유인석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강원도 영월군으로 집결시키고, 관아였던 관풍헌에서 연합 의병을 조직하여 호좌창의진을 출범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과]

유인석은 호좌창의진을 이끌고 충청북도 제천시와 충주시를 점령하고 친일 관찰사를 처단하며 한양을 향하여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강원도 정선군으로 물러났다. 정선군에서 의병을 일으킨 대략의 이유를 적어 상소를 올리고 유인석은 평안도를 거쳐 중국 만주 지역으로 건너가 항일 투쟁을 근거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인석이 강원도 영월군에서 결성한 호좌창의진은 전기 의병기 의병들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연합 의병이었으며, 비록 무기와 전술의 부재로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이어지는 항일 투쟁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한 경각심을 일신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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