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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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찬호 |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서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독립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6년간 실시하였다. 특히 1919년 당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탄압과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제적 착취 속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영월 지역은 농촌 지역이므로 영월 군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과, 산림령(森林令), 엽연초재배령(葉煙草栽培令) 등 지나친 간섭과 착취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영월 군민들은 독립운동 및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시행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영월 지역에서도 독립운동 및 만세 운동을 펼쳤는데, 영월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은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이다.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이전의 영월군 독립운동의 양상]
영월군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자 영월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을 보통학교 학생과 천도교인이 추진하였다. 하지만 일제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사례들이 전하여지고 있다. 천도교인인 천선재(千善在)는 1919년 4월 11일 영월군 주천장날에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4월 8일에 법흥리의 최춘일(崔春日), 4월 9일에 양변면[현 주천면] 신일리의 최성오(崔成五), 4월 10일에는 수주면[현 무릉도원면] 무릉리의 현성준(玄聖俊)을 만나 4월 11일 주천장날에 시위를 전개할 예정이니 동참하기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천선재가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시위가 전개되지는 않았다.
영월보통학교 4학년 학생인 엄정훈(嚴廷勳)과 2학년 학생인 장준영(張俊永)도 비밀리에 회동을 하고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을 세웠다. 영월의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이 합류하는 ‘합수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1919년 4월 15일에 발각되어 시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영월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천도교인들과 학생들이 영월 지역에서 선도적으로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가지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영월 군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영월 군민들은 박수창(朴受昌) 등이 중심이 된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1919년 4월 20일 영월군 양변면[현 주천면] 금마리의 박수창과 박수창의 아들 박광훈(朴光勳), 박수창의 처남 이용헌(李容獻)과, 이병익(李炳翼), 박수영(朴受永), 박재호(朴在鎬) 등이 함께 시위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박수창의 손자 박춘희(朴春喜)와 김창진(金昌鎭), 박수찬(朴受燦)은 태극기를 만들었고, 이후 독립 만세 운동을 진행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4월 21일에 영월군수 석명선이 마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수 일행도 함께 만세를 부르게 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또한 박광훈의 발의로 독립 만세 운동을 동참한다는 의미의 승낙서를 박수경(朴受景), 박수항(朴受恒), 박수호(朴受祜), 탁은상(卓殷相), 탁원근(卓源瑾), 남상은(南相殷), 박수동(朴受東), 원하현(元夏鉉), 전수길(全壽吉), 조종협(趙鍾協), 홍봉관(洪鳳官) 등을 만나며 서명하게 하였다.
1919년 4월 21일 주천장날에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 일행이 왔으나 오히려 석명선이 ‘만세반대자명부’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박수창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금마리에서 주천리로 가려던 군수 일행을 박광훈, 이병익, 박수영 등이 30~40명의 무리를 이끌고 가서 가로막았다. 이후 주동자들이 군수 일행을 둘러싸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였고, 석명선이 태극기를 높이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자 함께 있던 2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후 이병익이 석명선에게 독립만세연명부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석명선이 연필로 서명하여 잘 보이지 않자 박광훈이 다시 분명히 서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석명선은 요구하는 대로 독립만세연명부를 다시 쓰고 엄지손가락으로 날인하였다.
4월 21일 저녁 주천헌병파견소에서 헌병이 금마리에 도착하여 독립만세연명부를 압수하고 박광훈 등의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이후 23명이 붙잡혀 가서 옥고를 치루었다.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지역 위치상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과 길손들의 통행이 많아 독립운동의 소식을 일찍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영월 군민들의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일제의 경제적 착취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영월 지역의 유림이자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던 박수창을 중심으로 혈연과 지연 등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독립 만세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이전에는 영월 지역을 중심으로 세를 회복하려는 목적의 천도교인들과 당시 지식인이었던 학생들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에 이르러서는 유림 및 농민, 학생 모두가 동참하여 영월 군민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또한 이러한 독립운동 이후 영월 지역의 금융조합에서는 대부금 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채무자들이 대부분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금융조합이 파산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금을 갚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영월 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위 계층을 막론하고 영월 군민이 단합하여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망,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