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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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誾 |
영어음역 | Nam Eun |
이칭/별칭 | 강무,의령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개국공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이며, 형은 영의정 남재(南在), 아우는 우정승 남지(南贄)이다.
[활동사항]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급제, 1380년(우왕 6)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고 이어서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가 되어 왜구를 격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다.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구세력에 대립,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조인옥(趙仁沃) 등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지지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응양군상호군 겸군부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당시 국정의 폐해에 대하여 비판하고 개혁 정책을 펴다 1391년 정몽주(鄭夢周)에 의해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조박(趙璞)·정도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정도전·조준·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다.
1393년(태조 2) 경상도에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고 군적(軍籍)을 새로이 작성하였으며,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가 되어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 터 등을 정하였다. 1395년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형 남재(南在)와 함께 기복(起復)되어 이듬해 참찬문하부사겸판상서사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때 정조사(正朝使)의 표문(表文)이 명나라 태조의 비위를 거슬러 사신 정총(鄭摠)이 살해되고 그 글의 초안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정도전과 은밀히 의논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진도(陣圖)를 작성하는 등 요동 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장악, 태조를 도와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하였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심효생(沈孝生) 및 아우 남지와 함께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당하였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화동에 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곳에 묻힌 후 신원되어 그 일대를 사패지로 받았다.
[상훈과 추모]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1421년(세종 3)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숙종 연간에 묘표가 세워졌으며, 비문은 방손인 남구만(南九萬)이 찬술하고 예조판서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