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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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釋之 |
영어음역 | Lee Seokji |
이칭/별칭 | 남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홍영의 |
[정의]
고려 후기 용인에 은둔한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남곡(南谷).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낸 이송현(李松賢)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경덕재생(慶德齋生) 이흡(李洽)이며, 어머니는 영천윤씨(永川尹氏) 윤취(尹就)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석지(李釋之)는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41년(충혜왕 2)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을 때 간언을 잘하여 이색을 비롯한 여러 학사들과 함께 조정에서의 잘못된 일을 직간하다가 재상의 뜻에 거슬려 외직으로 좌천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배척되었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고려의 국운을 직감하고 남곡으로 옮겨 와 은거하였다. 이석지의 호를 남곡이라 이른 것도 남곡에 은거하면서부터이다.
[학문과 사상]
이석지가 남곡에 은거한 모습을 이색은 「남곡기(南谷記)」에서 “지금 선생은 남곡에 살고 있는데, 토지와 가옥이 있어 관혼빈제에 쓸 비용은 충분하므로 세상의 명리에 무심한지 오래이다. 그러나 은자(隱者)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해마다 서울로 올라와 친지를 방문하고 마음껏 술을 마시고 담소하였다. 서울을 오가는 도중에는 초라한 아이 종과 여윈 말에 채찍을 들고서 시를 읊조리곤 하였다. 수염은 백설처럼 희며, 붉은 뺨에는 광채가 돌았다. 만약 그림을 잘 그리는 자에게 그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면, 「삼봉연엽도(三峯蓮葉圖)」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남곡에 거처하면서 당시 문장가로 이름난 한수(韓修)와 성석린(成石璘) 등과 교유하며 시문을 화답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同) 72현의 한 사람으로 남았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고림동 오리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의 구인사(求仁祠)와 전라남도 광주시의 대치사(大峙祠)에 배향되었으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남곡재(南谷齋)에서 향사를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