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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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忠楗 |
영어음역 | Lee Chunggeon |
이칭/별칭 | 자안,눌재,목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절골말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눌재(訥齋)·목수(木叟). 영의정 이직(李稷)의 현손이며, 증조부는 이계령(李繼寧)이고, 할아버지는 이숙생(李叔生)이다. 아버지는 정자(正字) 이윤탁(李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부인은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이효언(李孝彦)의 딸이다. 아들은 이염(李爓)이다.
[활동사항]
이충건은 1510년(중종 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1515년(중종 10)의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16년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지내고, 1518년(중종 13)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을 거쳐 사간원정언·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때 자주 지진이 일어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묻자, 근래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재변은 조정정사(朝廷政事)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利害)·질병(疾病) 등을 함께 아울러 강구해야 함을 말하였다.
즉, 오늘날 대신(大臣)들의 기강이 먼저 서지 않은 것이 천재로 이어졌으니 대신들의 기강을 먼저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당시 훈구대신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講)할 만한 사람을 뽑을 때 조광조 등과 함께 뽑히기도 했다.
1519년(중종 14) 사간원헌납·이조정랑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죄를 받은 조광조 등의 죄목에 대해 연유를 물으며, 다시 서용하지 않으면 직사(職事)를 돌볼 수 없다고 사직을 청하였다.
곧이어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배척으로 파직되었다. 사사(賜死)된 조광조의 장례 때 사람들이 감히 가지 못하였으나 이연경(李延慶)·성수종(成守琮) 등과 함께 가서 통곡하였다. 1521년(중종 16)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 가는 도중 청파역(靑坡驛)에서 죽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절골말에 있으며, 부인 용인이씨와 합장묘이다. 묘소 주위에 설치된 문인석과 망주석 및 상석 등의 석물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규모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권된 이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훈과 추모]
1576년(선조 9)에 복권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