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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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處仁城勝捷記念碑 |
영어음역 | Cheoinseong Seungcheop Ginyeom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 of Cheoin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인영 |
성격 | 사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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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와비 |
건립시기/일시 | 1979년 12월 16일 |
관련인물 | 김윤후|살리타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
소유자 | 국유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고려 후기 처인성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비.
[개설]
고려 후기인 1232년(고종 10)에 처인성은 군창이 있던 지역으로, 전체 면적이 5,820평이고, 둘레가 425미터의 작은 토성이었다. 이 토성에서 세계를 제패한 몽고의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가 보잘것없는 고려의 승병장 김윤후가 이끄는 의병대와 일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원정군 사령관을 잃은 몽고의 병사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퇴각하였다. 처인성 승첩기념비는 몽고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친 역사적 기념비이다. 처인성은 1977년 10월 13일에 경기도 사적 제44호로 지정되었다. 그 해 처인성 복원사업이 실시되어 처인성 동쪽 성곽 120여 미터를 수축하였고, 이어 1980년 4월까지 남서, 북쪽의 성곽 205미터를 수축하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건립경위]
처인성 승첩기념비는 처인성 수축과 복원 공사를 계기로, 1979년 12월 16일 제막되었다. 이 비가 제막된 1979년 12월 16일은 살리타를 사살한 1232년 12월 16일로부터 747년째 되는 날이다.
[위치]
처인성 승첩기녑비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현내면이라 하였으며, 아곡리는 처인현 당시 관아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아곡리 인근 지방도 333호선에 인접해 있다.
[형태]
비는 와비이며, 2단의 화강암 기단부를 두었고, 그 위에 오석으로 몸돌을 얹었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는 “처인성승첩기념비(處仁城勝捷記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음기는 세로줄쓰기로 새겼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 처인성은 세계에서 가장 사나웠던 몽고군을 물리친 곳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외민족의 침입이 많았으나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같이 위태로운 때는 드물었다. 세계를 제패하려는 몽고는 동방의 강대국 고려를 굴복시키려고 1231년부터 40년 간 6차례에 걸쳐 대군으로써 침공하여 왔다.
1차 침입 때 평안도 귀주성, 자성의 항쟁도 그 하나이며 처인성에서는 역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232년 살리타를 대장으로 한 몽고군은 2차 침공을 시작하고 그 선봉부대는 경상도까지 내려가 노략질하니 팔공산 부인사에 소장하였던 고려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살리타는 주력부대를 남진시켜 지금의 서울 한양산성을 공략하고 한강을 건너 처인성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성 밖 백현원에 살던 김윤후는 처인성에 들어가 군, 평민, 천인과 힘을 합쳐 싸워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니 12월 16일이었다. 이에 몽고군은 크게 무너져 전군이 퇴각하였다. 왕이 김윤후의 공을 크게 가상히 여겨 상장군에 제수하였으나 그는 공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을 제수하였다.
처인성은 수원의 속읍으로 큰 성은 아니었으나 몽고의 대군을 맞아 성민은 용감하게 싸웠고, 승장 김윤후의 화살은 적 대군을 퇴각케 하였다. 김윤후는 뒤에 충주성 싸움에서 군병과 천인들을 이끌고 몽고병을 격퇴하여 그 남진을 막았고 동북면방어사가 되었으며 대몽항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 작은 성에서 세계를 정복한 몽고군을 물리친 한국 민족의 슬기를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비문은 1979년 12월 16일,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영희가 짓고, 글씨는 원곡 김기승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