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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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處仁城 |
영어음역 | Yongin Juminui Uigireul Aneun Cheoinseong |
영어의미역 | Cheoinseong Fortress Reflecting the Heroic Struggle of Yongin Peop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2리 산43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인영 |
[개설]
처인성은 현 행정구역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2리 산 43번지에 있는 성곽이다. 면적은 약 1,764㎡(5,820평)이며, 둘레는 425m이다. 북측면 좌측에 문대(門臺)가 있고 남쪽 면의 서측에 후문이 있었던 흔적이 보였으나 1979년 복원공사 때 이 부분을 절단하여 연대 등을 조사한 후 복토하여 지금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붕괴가 심하여 정확한 축조공법은 알 수 없으며, 성벽의 높이는 대개 3~5m로 보인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기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1979년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처인성 보존공사를 실시하기 전에 사학자 이선근 박사를 비롯한 일단의 학술조사반을 초치하였다. 이들 학술조사반은 현지를 답사한 후 절단되거나 절토된 성벽의 단면을 분석하고, 토기편 등을 수집한 후 이곳이 백제시대에 축성된 토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토축된 성벽의 주위는 3리(里)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軍倉)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부곡에서 현으로 승격된 항몽의 승첩지 처인]
처인은 본래 수주(경기도 수원과 화성 지역의 옛 지명)에 속해 있던 하나의 부곡이었다. 종래의 학설을 따르면, 부곡(部曲)이란 천민집단이 사는 향이나 소 다음의 말단 행정구역에 속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처인성조의 기사를 보면 “고려시대의 군창이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이전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처인성이 용인시 남사면으로부터 화성과 평택으로 이어지는 경기평야 지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이전부터 군량미나 식량 보급기지로서의 기능을 감당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 수주의 관할 부곡으로 관리되어 오던 처인부곡은 조선 개국 초인 1397년(태조 6) 현으로 승격된다. 이 시기에 주변에 많은 부곡이 있었음에도 처인부곡만이 현으로 승격된 것은 이곳이 고려 후기 항몽 승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공민왕 때 중국에서 창궐한 홍건적이 침공하여 안성에 이르자 지역 장수와 주민이 합세하여 크게 물리친 일이 있었다. 이 공을 인정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안성을 지군사로 승격시키고 홍건적에게 항복한 수원군을 현으로 강등시킨 일이 있었는데, 처인은 항몽사상 가장 큰 전과가 있었던 곳이기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배려에서 현으로 승격시켰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려 후기 이곳 처인에서는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고려와 몽고의 격돌]
동방의 강국 고려와 몽고의 첫 만남은 고려 후기인 1218년(고종 5) 12월 1일경이었다. 이때 몽고 원수 합진(哈眞)과 부원수 찰자(札刺)는 거란의 패잔병을 추격하여 거란군의 최후 집결지였던 고려의 강동성을 향하여 진군해 오고 있었다. 당시 몽고군들은 이 지역의 지형지물에 낯이 설어 작전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란군은 몽고군들의 이런 허점을 이용하여 지구적인 산악 방어전을 전개하면서 대처하고 있었다. 때마침 몽고군은 엄청난 눈사태를 만나게 되어 병참선이 끊어지게 되었고, 거란군의 전략에 깊숙이 말려 들어가 추위와 굶주림에서 막다른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한편, 고려는 북계병마사의 지휘하에 고종 3년부터 줄곧 고려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던 거란의 잔당들을 토벌하고 있었다. 이때 같은 지역에 있던 고려군과 몽고군은 거란군의 격퇴라는 합동작전 과정에서 첫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물론 합동작전에서 고려의 영토권 내에서 궁지에 몰린 몽고군을 고려군이 구원해 주는 상호 관계에서의 제휴였다. 그러나 몽고의 입장은 고려와 전혀 달랐다. 몽고군에게 이 강동성에서의 전투는 거란의 패잔병 토벌을 구실로 고려에 대한 전투정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몽고는 본래 유목민으로 요와 금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테무친[鐵木眞] 때 부족을 평정하고 중앙아시아와 헝가리,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후 셋째 아들인 쿠빌라이가 부제(父帝)의 유지를 받들어 후에 금국을 정벌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몽고에게 쫓기던 거란이 고려의 변방에 몰려와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고려는 이들을 토벌할 목적으로 몽고에게 협공작전을 요구했는데, 몽고는 이것을 빌미삼아 고려에 큰 은혜나 베푼 것처럼 매년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예를 들면 “수달피 가죽 1만 령, 명주 1천 필, 모시 2천 필, 용단묵 1천 개, 붓 2백 관, 종이 10만 장, 자초 5근, 남순·황하·주홍 각 50근, 광치·동유·자청 각 50근” 등 진귀한 품목을 요구하며, 전에 가져갔던 공물의 질이 나쁘다는 등의 생트집을 잡아 고려 조정을 괴롭혔다.
그 무렵 1224년(고종 12) 11월, 몽고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와서 일을 마치고 이듬해인 1225년 귀국하던 중 압록강 건너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었다. 몽고는 이 사건을 고려의 소행이라고 트집 잡으며 고려 정복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때 몽고의 원수로 임명된 사람은 전에 강동성역에서 전투정찰을 체득한 살리타[撒禮塔]였다.
살리타가 정예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 일대로 침공을 감행하자, 고려군의 박서·김경손 등은 평안도의 자성과 귀주성에서 강력히 대항하여 격퇴하였다. 그러나 몽고군은 무적을 자랑하는 강병인데다, 적을 잡아 적을 치게 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전쟁을 수행할수록 병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고려는 각개 내지 소부대 유격방어전을 펼쳐 이에 맞섰고, 산악지대와 대소 성루를 거점으로 공방전을 벌였다.
이렇게 되자 정황을 예측하기 어렵게 된 몽고군은 고려의 병력을 각 거점에 고착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개경 근처에서 야만적인 약탈과 함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살리타가 보낸 사신을 맞아들여 사대외교를 수락하는 척하면서 수전에 약한 몽고군의 취약점을 이용,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한편 “모든 백성은 산과 들에 웅거하여 적을 무찌르라”고 명하기에 이른다.
이에 살리타는 동년 9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2차 침공을 감행하여 고려 조정이 강화로 파천한 것을 힐문하는 한편, 고종의 출륙을 요구하며 개경을 함락시키고는 더욱 압력을 가하기 위하여 계속 남하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즈음 몽고군에 잡혀 있던 어사잡단 설신(薛愼)이 “이국 대관으로 남강을 건너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고 충고하면서 만류하였지만 살리타는 이를 묵살한 채 남하하여 한성을 점거하였고, 선봉부대는 파죽지세로 경상도까지 치고내려가 약탈과 방화·인명 살상 등의 야만적 만행을 저질렀다. 팔공산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소실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외에도 찬란한 고려 문화가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수없이 짓밟혔다.
[살리타는 왜 처인성 공략에 나섰나?]
살리타는 수주를 지나 중원경 청주로 진로를 잡고 남하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232년 12월 16일, 살리타는 동정군(東征軍) 원수이며 최고사령관인 동시에 한반도 공략의 책임자로서 중군에 속한 최정예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처인성 공략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승장 김윤후가 몽고군을 대적했던 처인성의 성곽 둘레는 425m, 총면적 1정 7묘,즉 1,764㎡에 불과한 작은 토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공략하는데 왜 몽고군의 최고사령관인 살리타가 직접 출정을 했는가가 문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 용인은 지리적인 위치만 보더라도 한반도의 남반 지대 공략에서 대세를 좌우할 만한 요새는 아니다.
물론 용인이 삼남으로 통하는 관문이라 하더라도 처인성은 그 길목에서 30여 리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먼 길을 우회하면서까지 반드시 처인성을 유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 문제의 열쇠가 될 만한 문헌이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 문제와 결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병참기지 확보의 필요성이다.
당시 고려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사하여 몽고군이 이르는 전략적인 진로나 위치에는 식량이 될 만한 것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처인성이 고려군의 식량보급기지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려군이 몽고군의 손길이 미칠 것을 예견치 못했거나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였다면,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에게 군창으로서 처인성은 식량을 확보해야 할 시급한 전략 목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전략 물자의 보급 및 수송이 우선시되어야 하는데, 군사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 제공이 원활치 못하다면, 최소한 현지 확보나 조달의 수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소규모 부대 단위의 산발적인 항전, 즉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법에 익숙한 고려군의 습격을 언제 어디서 당할지 모르는 적국 내에서 전진부대의 분산배치가 불합리하다는 판단하에, 그리고 식량을 운반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예하부대의 단일 진공작전 계획에 의하여 중원경으로 남하하는 길목 30리에 있는 처인성 공략에 살리타가 직접 나서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살리타의 오판]
만약에 살리타가 처인성을 포위한 채 지구전을 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하였다면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처인성 안에 있던 사람들을 도륙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당시 처인성 안에는 많은 인원이 마시고 먹을 수 있는 식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주위로부터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둘째, 겨울철의 혹한은 적보다 더 큰 위협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며, 또한 열세한 인원으로 세계를 제패한 정예 몽고군과 맞선다고 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살리타는 왜 이와 같은 전략을 강구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해 보면, 첫째는 12월 16일이라는 날짜는 음력 일자이므로 혹한기로 볼 수 있으니 천시가 불리하였을 것이고, 둘째는 고려군의 청야전술로 군량의 현지 조달이 어려웠다면 이곳 군창에 보관되어 있는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박하였을 것이다.
셋째는 한반도 원정을 책임지고 있는 살리타 자신의 주력부대가 작전상의 일정에 차질을 빚으면서까지 정규군도 아닌 오합지졸과 맞붙어 지구전을 편다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넷째는 처인성이 한반도 공략에서 그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충지는 되지 못하나, 군량미를 지키겠다면서 일전을 불사하는 고려의 의병들을 애교로 보고 상대해 줄 만큼 살리타가 이끄는 주력부대의 처지가 한가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살리타는 처인성에 이르자마자 즉각적인 공성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것이 참패의 원인을 낳은 오판이었다.
[김윤후의 치밀한 전략전술이 만들어낸 처인성의 승전보]
이러한 조건하에서 김윤후는 중원경으로 남하하는 길에서 그들의 허를 찔러 발목을 잡는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곧 몽고군의 작전 일정에 차질을 빚게 하였고, 그 사이 고려의 관군과 의병들은 양민을 대피케 하여 무고한 인명의 살상을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은 또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싸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하자는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 1232년 12월 16일에 벌어진 처인성전투의 상황을 유추하여 보기로 한다.
“처인성의 성문과 성곽 주변은 목책으로 굳게 방비되어 있었다. 성 안에는 승병과 의병들은 물론이고 처인부곡의 농부와 천인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성내는 협소하였으므로, 승장 김윤후 휘하 장병들의 수효는 4~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토성은 서남에서 동북으로 기울었고, 내부는 지형에 따라 2~3단계의 층급을 이루고 있었으며, 가장 높은 곳에는 승병과 의병들의 기치가 세워져 있었다.
이처럼 토성의 방비가 완벽하다 하더라도 사막과 고원을 주름잡던 몽고의 철갑기병과 비교한다면 여지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고려 의병들은 타민족에게 복속당하기보다는 의로운 죽음을 택하기로 정신무장이 되어 있었고, 처인부곡의 백성들은 고려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집념으로 뭉쳐 있었다. 또한 호국불교의 정신과 집념으로 불타는 승병의 살신성인 정신과 승장 김윤후의 탁월한 통솔력에 의하여 전력이 가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몽고군이야말로 무적 철갑 강병으로, 그 발길이 미치는 곳마다 제국이 무너졌고 민족이 도륙당하며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는 그야말로 공포의 군대요, 정복자의 오만한 병사가 아닌가? 더욱이 거란 토평을 구실로 강동 성역에서 풍토와 지형지물 등 산악전을 위한 경험까지 축적했던 군대로서 그들의 앞에 놓인 작은 토성쯤이야 눈 한 번만 크게 떠도 박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 작은 토성을 에워쌓던 천군만마는 그들만의 정공법으로 지축이 내려앉을 만한 기세로 덤벼들었으나, 풀 한 포기 없이 다져진 토성은 물을 부어 얼어붙은 빙벽이었다. 사방의 목책을 넘어가다가 방책 사이로 내려찍는 죽창이나 도끼에 맞아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를 초조하고 불쾌하게 만든 것은, 몽고군의 최정예군이 이 작은 토성에 묶여서 곤혹을 치르고 있다는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에 격분한 살리타는 그 자신이 선두에 나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나섰다. 이때의 호기를 포착한 김윤후는 수우각궁에 화살을 걸고는, 백마 위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살리타를 향해 혼신의 힘으로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일직선으로 날아가 안면 깊숙이 파고들자 살리타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마상에서 떨어져 비명횡사하기에 이른다.
이를 보면서 김윤후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보아라! 적장이 무너진 마당에 이제 두려울 게 무어냐, 이 싸움에서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이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여 살아남는다면, 천인과 백정, 봉졸의 문적을 없이 하여 모두 양민이 되게 하리라. 삼보에게 맹서하노니, 나를 믿고 따르라! 적을 무찌르고 최후까지 싸워 이기자!’ 그리하여 사기충천한 의병과 처인부곡 백성들은 승세와 신바람을 타고 뛰쳐나와 무너지는 적을 맘껏 무찔렀으리라!”
이런 각도에서 유추한다면 김윤후는 승려이면서 용병의 지략과 기지, 천시와 지리, 그리고 전략적인 면에서 통달했던 유능한 전술전략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본다면 김윤후 부대가 살리타를 물리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윤후의 화살에 사령관 살리타가 전사하자 부장 첩가는 부랴부랴 그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이국 대관으로 남강을 건너는 것은 불길하다”고 충고했던 고려 관원 설신의 말이 옳았음을 시인하고 “그를 식견 있는 사람”이라 하여 석방한 다음 강화도로 돌아가게 하였다.
[저격인가, 항쟁인가]
그렇다면 처인성전투에서 몽고군의 최고지휘관인 살리타를 사살한 김윤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윤후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처인성전투와 관련하여 김윤후에 관한 『동국여지승람』의 고려사조 기록을 보면, “이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공을 함께 싸웠던 관노·백정 등 천인에게 돌리고 종과 복속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 돌아가도록 했으며, 자신은 본연의 승려 신분으로 돌아가 수도를 하겠다고 하자 조정에서는 섭랑장으로 개수(改授)하여 예우……”하기에 이른다.
그후에도 김윤후는 국난이 있을 때는 분연히 일어나, 제4차 몽고 침입 때는 충주산성 발호별감으로 싸웠다. 이때 몽고의 남진을 막은 공으로 동북면 병사가 되었으나, 당시 동북면이 몽고의 점령하에 있었으므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김윤후에 대한 마지막 기록(『동국여지승람』고려사조)에서는, “원종 때 추밀원부사가 되고, 다음해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치사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처인성전투와 관련하여 이선근이 펴낸 『대한국사』 권3에서는 “성중에 피난하고 있던 김윤후”로, 김정기 감수의 『한국사』에는 “김윤후는 백현원의 승려였으며, 우연히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몸을 의지했던 난민”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용인시 보존기록과 이병도 편의 『한국사』(진단학회)에는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던 김윤후”로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동국여지승람』과 『용인군읍지』 등을 보면 당시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죽인 김윤후의 행적이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살리타가 “처인성위유시(處仁城爲流矢)”라 하여 성중에서 날아온 화살에 우연히 맞아 횡사한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김윤후가 거둔 전과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김윤후가 처인성전투 당시 처인성에 머물렀던 것만큼은 공통된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피난 중에 몸을 의탁하여” 있던 중, 또는 “처인성 부근에 숨어 있다가 우연히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에 휩싸였다”고 하는 식의 표현은 싸움의 성격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바로 살리타의 죽음이 단순한 저격의 결과인지, 혹은 적극적인 항쟁의 결과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과연 살리타는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일까?
김윤후가 “일찍이 중이 되어 거했다”는 백현원(白峴院)은 진위현에 있던 역원으로, 고려시대부터 실시된 역참제에 의해 승여사에서 관리하였다가,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양재역찰방 소속으로 있었다.(『동국여지승람』진위현편) 진위현은 용인현 경계로부터 남쪽으로 43리쯤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평택시 남쪽 10리쯤 되는 지점에 있던 역원이었다. 이것만 두고 보더라도 처인성에서의 승첩은 김윤후 장군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적극적인 항쟁이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먼저 살리타가 한성과 수주를 지나 처인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여러 문헌의 기록이 일치하거니와, 이때 김윤후가 피난을 하였다면 적이 병참기지 확보를 위해 쳐들어오는 위험한 길목 쪽으로 40여 리나 거슬러 갔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김윤후가 머물렀다는 백현원은 처인성 부근이고, 그곳이 진위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살리타가 수주→진위→처인의 코스로 움직였던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김윤후의 행적을 ‘쫓기는 피난민’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쫓기는 피난민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적의 사정거리 밖으로 안전하게 피신하는 행로를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인의 위치에서 본다면 수주나 진위는 등거리이다. 이 때문에 수주가 살리타의 수중에 떨어질 즈음 진위현의 작은 역원인 백현원에 있었던 승려 김윤후는 승병, 또는 사전에 조직된 의병과 현지 관속이나 주민 등과 합세하여 40여 리 떨어진 처인현 군창인 처인성에 포진하고 있다가 적극적인 항쟁 끝에 살리타를 죽이는 전과를 얻어내었다는 심증을 굳게 한다.
특히 처인성과 주변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이곳이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또한 숲속에 숨어서 저격할 만한 지형지물도 없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숲속에 숨어서 살리타를 저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나 암살했을 것이라는 설, 또는 문헌의 기록같이 ‘성중유시(城中流矢)’에 의해서 살리타가 비명횡사했다는 것 등도 현장이 말해 주는 지형지물의 정황을 감득지 못한 구전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高麗史)』에 “김윤후의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에 제수하였으나 김윤후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서 싸울 때에 나는 활도 화살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헛되이 무거운 상을 받겠습니까?”라는 기록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이 싸움은 최소한 김윤후가 인솔, 지휘하였던 승병이나 의병, 처인현 백성들의 항쟁이 빚어낸 결과였으며, 그 공은 이들을 통솔한 김윤후 장군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이에 중앙, 또는 학계의 역사학자들은 용인 사람들의 의기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김윤후의 행적이나 그와 관련한 백현원 등에 관하여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