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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127
한자
영어음역 Tap
영어의미역 Pagoda
이칭/별칭 불탑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선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사찰에 조성된 불교의 사리신앙에서 기원한 축조물.

[개설]

탑이란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다. ‘탑파(塔婆)’의 준말로서 인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스투파[率堵婆]’라고도 한다.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stupa’의 소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탑파는 팔리어[巴梨語, Pali]의 ‘thupa’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원래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묘(墓)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결국 탑이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인 지역에 있는 석탑은 모두 9개이다. 고려시대 이전의 완전한 형태의 석탑은 현전하는 것이 많지 않고 온전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서도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고 대부분 복원되거나 탑재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어비리 삼층석탑]

원래 어비리 삼층석탑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막골 금단사 터에 있었던 석탑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폐사시키어 어비리 주민들이 흩어진 불교 유물을 모아 어비울 마을에 봉안하였다. 1963년 저수지 공사로 인해 이전·복원되어 현재는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산99번지 동도사(東度寺)에 있다.

1988년 『기내사원지(畿內寺院誌)』에 의하면 1963년 해체할 때 어비리 삼층석탑 내부에서 소탑 1점, 옥석, 향로 1점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모습은 1963년에 복원한 모습이고 현재 석탑의 총 높이는 270㎝이다.

석탑의 형태를 살펴보면, 커다란 기단과 3층의 탑신을 지니고 있어 안정된 구조감을 보인다. 기단부는 2단으로 나뉘었는데 하대석은 4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면석에는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모각하였다.

하대 갑석은 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는데, 그 하단에 1단의 부연을 각출하였고, 상면에는 2단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상대의 면석은 4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모각하였다.

상대 갑석의 받침부에는 별매석으로 제작된 옥신받침을 두었다. 탑신부는 상륜부가 멸실된 상태이고 1층과 3층의 옥개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탑신부와 옥개석은 별도의 화강암으로 각각 제작하였다.

각 옥개석 상단에는 탑신 받침을 마련하고 처마의 곡선은 날렵하고 세장하게 만들었으며 전각은 얇고 끝을 살짝 올렸다. 각 층마다 옥개받침을 4단으로 모각하고 외면으로는 낙수 홈을 팠다. 그 이하로는 탑신을 올렸는데, 탑신 양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크게 모각하였다.

어비리 삼층석탑을 보수하기 이전의 원형 석재는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 초기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날렵하면서도 세장하고, 번잡한 문양 없이 단순하면서도 단정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각 면석부의 기둥 모양은 3매로 구성되어 있고, 상대갑석 위에 탑신받침을 별매석으로 마련하고, 옥개받침을 4단으로 구성한 것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보이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세리 오층석탑]

현재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으며, 문화재자료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세리 오층석탑은 사지(寺址)로 추정되는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가 원래의 위치인 것으로 추정된다.

공세리 오층석탑은 낮은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부의 비례가 다소 맞지 않아 불안정하지만 단정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가 멸실되어 현전하는 석탑의 총고는 270㎝이고, 일부 부재는 파손된 형태이다.

기단부는 이중으로 탑신부에 비해 다소 낮고 작다. 특히 하대 갑석의 상부 대석만 노출되고 이하는 매몰된 형태이다. 하대 갑석은 1매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단판 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부에는 얕은 3단의 면석 받침을 각하였다.

상대 면석은 4매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2매만 남아있고, 각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각하였다. 탑신부는 5층으로 구성되었다. 제1층은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별도의 돌로 제작되었으나 2층 이상은 탑신과 옥개석이 1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별다른 문양을 넣지 않고 탑신 양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기었다. 옥개석 하단은 3단의 옥개받침을 각출하였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며, 전각 부분은 경쾌하게 살짝 들어 올렸다. 모서리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공세리 오층석탑 북쪽으로는 안상이 새겨진 연화대좌와 두부가 결실된 고려시대 석불좌상 1구가 안치되어 있어 공세리 오층석탑과 함께 같은 사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천리 오층석탑]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에 있는 용천리 오층석탑은 현재 사지(寺址)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사지 부근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8년 현재의 위치로 이동·복원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오층석탑의 형태였으나 마지막 오층과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현재 높이는 총 430㎝ 정도로 용인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세장한 형태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부는 하대석이 생략된 단층의 형식으로 2매의 지대석 위에 별도의 하대석을 놓고 면석과 갑석을 올렸다.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하였고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각하였다. 갑석은 새로 복원한 별석이다. 기단부는 전체적으로 높이가 높아 약간 불안정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1층의 경우 기단부와 유사할 정도로 높게 만들었으나 2층 이상부터는 매우 낮게 만들어 체감 비율이 급격한 편이다. 각 층의 탑신부와 옥개석은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옥개 받침은 4단으로 비교적 두텁고 넓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낙수면은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직선적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을 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복원된 부재가 많이 혼재되어 있어 원형의 모습을 많이 상실한 상태이나 용인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석탑이다.

[두창리 삼층석탑]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 주내마을 입구에 있는 두창리 삼층석탑은 현재 사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두창리 삼층석탑은 1984년에 부재를 도난당하였으나 다시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3층의 옥개석과 상륜부는 멸실한 상태이지만, 삼층석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정도의 형태로는 남아 있다.

현재 전체 높이는 약 300㎝이다. 기단부는 단층인데 하대석은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기존의 석탑재와 다른 부재로 복원되어 있다. 기단 면석은 4매로 구성되었으며 면석은 양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모각하였다.

상대 갑석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부에 부연이 표현되지 않은 형태이고 상부에는 탑신 받침이 2단으로 각출되었다. 탑신부에 비하여 기단부는 작고 단층으로 만들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약간 불안정해 보인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별도의 돌로 만들었다. 탑신석은 세부 문양 없이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모각하였다. 탑신석은 높고 좁은 편이며 옥개석도 높고 두터운 편으로 전체적으로 약간 둔중하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편이며 지붕 끝의 전각이 살짝 올라갔다. 옥개 받침은 3단으로 역시 높고 두터우며, 상면에는 탑신 받침 1단이 각출되어 있다. 각 옥개석의 경우 모서리가 많이 파손되었으며, 풍우에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다. 3층 옥개석의 상면 중앙에는 작은 원공이 있다.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용덕사(龍德寺) 삼층석탑 탑재]

용덕사 터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성륜산에 있는 절 터인데, 현재는 조계종 사찰인 용덕사가 세워져 있다. 원래의 절 터는 용덕사에서 북서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792년의 『용인군성륜산굴암용덕암창건기(龍仁郡聖輪山窟巖龍德庵創建記)』에 의하면 용덕사는 신라 문성왕 대에 염거화상이 창건하고 도선국사가 삼층석탑과 철인(鐵人) 3인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용덕사 삼층석탑의 부재가 남아있으며 석탑 안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인상 2구도 유존한다. 이 유물들은 창건기의 내용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유물로 판단되나, 창건기에 석탑의 건립과 관련된 유물들이 현전하고 있어 주목되는 자료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탑 부재는 많지 않으며, 파손 상태도 심하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는 기단 면석 2매와 기단 갑석 1매, 탑신석 1매, 옥개석 2매, 보주 등이 마모가 많이 진행된 상태로 짜 맞추어진 상태이다.

갑석 상면에는 탑신 받침이 2단으로 각출되어 있고 옥개석은 세장한 편이다. 보주의 경우 아랫 부분은 꽃잎형이고 상단은 뾰족한 모양이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의 크기나 형태로 보아 원래 삼층석탑이었고 대략 2m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봉리(栢峰里) 삼층석탑 탑재]

백봉리 절 터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 10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988년 『기내사원지(畿內寺院誌)』에 의하면 백봉리 절 터에 삼층석탑 부재와 주초석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석탑 부재는 인접한 113번지 태고종 사찰인 대은사로 옮겨져 오층석탑 형태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다.

옛 부재로 남아 있는 부재는 기단 갑석, 제1탑신석, 제1옥개석, 제2옥개석이고 또 다른 탑의 옥개석 부재도 있다. 상대 갑석은 하단부가 땅에 매몰되어 있는 형태이다. 제1탑신석은 양 모서리에 기둥 모양이 모각되어 있고, 제1옥개석은 3단의 옥개 받침을 각하고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석탑 체감율도 완만한 편이다.

[마북리 탑재]

현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330-1번지에 있으며 여러 종류의 탑재가 단순하게 쌓아진 형태이다. 현재는 미륵불을 봉안한 용화전 앞쪽에 위치하여 있다. 남아 있는 부재는 지대석, 제1탑신석, 제1옥개석, 다른 종류의 부재인 연화대석, 옥개석 2매 등이 무질서하게 올려진 상태이다. 기단부는 남아 있지 않고, 옥개석의 표현 방법도 모두 달라 하나의 탑재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여러 탑재가 혼용된 상태로 보여 진다.

[서봉사 터 탑재]

현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21번지에 있다. 이 지역은 현 오국사탑비가 있는 용인의 중요한 고려시대 서봉사 터로 현재 삼층석탑은 없어진 채 탑지만이 남아 있다. 탑지 주변에 남아 있는 석재는 지대석, 하대갑석, 하대면석, 상대갑석, 제2탑신석, 제3탑신석, 제1옥개석편, 노반석 등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탑재로 보아 삼층석탑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금수암(金水庵) 터 석재]

원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중동에 있었던 절 터로서 현재는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봉불사에서 지금의 위치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금어리에 옮겼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석재는 방형의 하대석, 탑신부, 상대석, 보주 등이다. 금수암 터 석재는 탑재인지 불상의 대좌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현재 기타 다른 부재가 섞여서 단순하게 쌓아진 형태로 보관되고 있다.

[의의]

우리나라의 불교 탑파는 인도·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이 이루어졌다. 또한 불탑은 불상과 함께 불교 조형물 중에서도 신앙 대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고 할 만큼 대량 제작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1,000기가 넘는 석탑이 현재 잔존해 있다. 탑파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따라서 탑파와 불상은 가장 뛰어난 불교 미술로서 한국의 고대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인 지역의 경우 고대의 불교 문화 유적지가 타 지역과 타 문화에 비해 많이 유존한 편은 아니며 변형과 파손이 심한 실정이다.

현존하는 용인 지역의 석탑은 오층석탑 2기와 삼층석탑 3기 이상이 있다. 대부분 4m 내외의 비교적 작은 규모에 단순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제작된 석탑으로 보인다.

그러나 용인 지역에 남아 있는 절 터의 수가 다수 남은 것에 비하여 석탑은 비교적 적은 수가 잔존하여 있다. 따라서 용인 지역의 융성한 불교 문화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보존과 보수의 손길이 필요한 실정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6 행정지명 현행화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2012.01.06 [어비리 삼층석탑] 금단사 터에 있었던 석탑이다. ->금단사 터에 있었던 석탑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폐사시키어 어비리 주민들이 흩어진 불교 유물을 모아 어비울 마을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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