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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701
한자 佛敎遺物遺蹟
영어음역 Bulgyo Yumul Yujeok
영어의미역 Buddhist Relics and Archaeological Sites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집필자 정연학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 분포하고 있는 불교 관련 유물과 유적.

[불교유적지]

용인시에 남아 있는 불교유적으로는 신라 때의 백련암(白蓮庵)·용덕사(龍德寺) 등이 있고, 서봉사(瑞峰寺), 박곡사(朴谷寺)는 절터만 있다. 백련암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향수산 기슭에 있는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801년(애장왕 17) 3월 5일에 신응(愼應)이 창건한 절로서, 고려 말 1389년(공양왕 즉위)에 중수된 이래 몇 번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절에는 조선 초 무학대사가 중건할 때 조성한 18나한상 가운데 14위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역시 현재 용주사의 말사인 용덕사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성륜산에 있다. 신라 문성왕[839~857년 재위] 때 영거선사(靈居禪師)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삼층석탑 1기와 보살상·철인(鐵人) 3위를 조성하면서 중창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위에 암굴이 있어서 일명 굴암절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남아 있는 삼층석탑은 도굴·파손된 것을 다시 조합한 것이며, 철인 3위 가운데 각각 48㎝, 44㎝ 높이의 2위만이 암굴에 남아 있는데, 현재 수원용주사 박물관에 있다. 이 철인은 이 곳의 산세와 자리에서 솟아나는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해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신라 말에 창건된 절 동도사[옛 사명 금단사]가 있는데 한국대중불교 불이종 본산이다. 동도사에 통일신라시대 말기와 고려시대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다.

신라시대 절터로서 박곡사지(朴谷寺址)가 있다. 박곡사는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대덕산 기슭에 있었던 절이다. 신라 때 창건된 절로 임진왜란 때 페허가 되었다. 삼층석탑 1기와 석불 1구가 남아 있었으나, 삼층석탑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고, 현재는 높이 110㎝, 너비 78㎝ 정도의 보살상 1구가 남아 있다. 최근에 500구의 나한상이 흩어져서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오백나한을 봉안한 나한도량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절터 부근을 나한골·오방난골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용인시 지역의 절들은 당시 남천군통(南川群統)의 감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승관직으로는 진흥왕 때 중앙의 최고 승관직으로서 국통(國統)이 있었고, 신문왕 무렵 9주 제도가 마련되면서 9주마다 주통(州統) 1인과 군통(郡統) 2인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주의 주통 1인당 두 사람의 군통이 배속되었다.

군통은 주통을 보좌하여 관할 군현의 사원을 관리·감독하였다. ‘봉암사지승대사적조탑비문’ 가운데는 879년(헌강왕 5)에 남천군통 훈필(訓弼)이 등장하는데, 당시 용인 지역의 사원은 훈필의 관리와 감독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수지구 신봉동에 있었던 고려시대 사찰 서봉사(瑞峰寺)는 현재 대부분 폐허 상태로 탑재와 부도 및 석등의 부재들이 널려 있지만, 보물 9호인 현오국사탑비가 남아있다.

[불교유물]

용인시의 불교유물로는 신라시대 석불로서 목신리 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2호]과 천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 산1번지 속칭 신촌부락에 있는데, 높이 175㎝, 무릎폭 70㎝, 두께 33㎝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鷄)가 있고, 원만한 상호(相好)의 윤곽을 나타내 보이지만 얼굴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양쪽 귀도 훼손되어 윤곽만 있고, 목의 삼도(三道) 역시 분명하지 않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앞가슴은 반원으로 노출되었다. 오른손은 외장(外臧)하여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였고, 왼손은 손상되었으나 여원(與願)의 통인(通印)을 결한 모양이다.

법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처지면서 서너 겹 깊은 골을 드리우며 아래로 흘렀다. 석불 뒤로는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인 작은 판석이 하나 있는데, 석불의 보개석(寶蓋石)으로 보인다. 불상의 조상 수법으로 보아 7~8세기를 전후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불 앞에는 제단으로 쓰인 판석이 있다.

천리 석조여래입상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적동저수지 입구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좌측으로 옮기고 당우에 안치되었다. 그 후 다시 용덕사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상 전체를 백분으로 칠하여 원형의 식별이 어렵다. 대략 머리는 소발(素髮)인 듯하고, 육계는 식별되지 않는다. 법의는 통견이고 두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았다.

앞가슴에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紋)이 두 팔 아래부터는 길게 처지면서 양다리 위로 하반신의 윤곽이 탄력 있게 드러나고, 군의(裙衣)의 옷 주름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수결은 시무외, 여원의 통인으로 보이나, 손목 부분이 모두 없어져 확실하지 않다. 발목 아래는 묻혀 있으나, 전체적인 감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외에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은 용인시에서 발견된 유일한 금동불상이다. 전체 높이 11.3㎝, 불신 높이 8.5㎝, 좌대 2.8㎝인데, 도금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머리의 육계는 뚜렷하나 귀는 흔적만 남아 있다. 목의 삼도는 분명하지 않고, 법의는 통견으로 U형으로 앞가슴이 노출되었고, 두 팔에서 밑으로 흘러 발등까지 드리워져 있다. 배에는 희미한 군의의 매듭이 나타나고, 두 다리 위로는 하반신 윤곽이 선명하다.

대좌(臺座)는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으로 8판씩 조각했으나 심하게 부식되었고, 복련 아래로 있는 8각의 받침 가운데 2면에 안상(眼象)을 새겼으나 역시 흔적만 있다. 손목은 파손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다. 뒷면에 돌기 부위가 있어 광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인 조형(造形)과 수법으로 보아 대략 8세기 신라의 불상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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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보물고적자료

[석탑]

경기도 용인시에는 현재 9기의 석탑과 탑재가 남아 있는데, 한강 이남 지역에서 안성 다음으로 많다. 이 가운데 기단부와 탑신부가 제대로 남아 있어 원형 복원이 가능한 것이 5기이고, 탑재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4기이다.

이 가운데 용인 어비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며, 나머지는 고려시대의 것들이다. 그러나 용인시의 석탑은 이전되거나 변형된 것이 많아 사찰 또는 사지의 배치와의 관련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일제시대에 존재했던 석탑들이 현재 많이 멸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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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과 시대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6 행정지명 현행화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2016.07.06 서봉사지 유적 추가 보물9호 현오국사탑비, 서봉사지 내용 추가
2012.01.05 [불교유적지] 추가 1) 각각 48㎝, 44㎝ 높이의 2위만이 암굴에 남아 있다. ->각각 48㎝, 44㎝ 높이의 2위만이 암굴에 남아 있는데 현재 수원 용주사 박물관에 있다. 2) 추가 <문단><지명>신라</지명> 말에 창건된 절 <기관>동도</기관>사[옛 사명 <기관>금단사</기관>]가 있는데 <기관>한국대중불교 불이종 </기관>본산이다. <기관>동도사</기관>에 통일신라시대 말기와 고려시대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다.</문단>
이용자 의견
이** 수지구신봉동광교산에는서봉사지가있고,
서봉사지현오국사탑비는보물9호입니다.
  • 답변
  • 디지털용인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에 따라 수정하였습니다.
20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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