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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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道泰 |
영어음역 | Kim Dot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종구 |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김도태[1891~1956]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910년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0~1912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삼악학교(三岳學校)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2년에는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3년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왔다가, 1916년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후에 귀국하여 1918년 재령(載寧)의 명신중학교(明新中學校)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19년 2월 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송진우(宋鎭禹) 등이 모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최남선이 기독교 측의 인물과 교섭하기로 하고 먼저 정주 기독교장로교회 장로인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하기로 하였다. 이에 최남선은 현상윤(玄相允)으로 하여금 오산중학교 경영을 핑계로 상경하도록 하라는 연락을 부탁하자, 현상윤은 정노식(鄭魯湜)을 시켜 그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김도태에게 이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김도태는 정주로 가서 박현환(朴賢煥)을 통하여 선천(宣川)에 가 있던 이승훈에게 연락하였다.
연락을 받은 이승훈은 급히 상경하여 최남선과 만나 기독교 측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동의함으로써, 1919년 3월 1일의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 뒤 김도태는 민족 대표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에는 휘문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경성여자상업학교(현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조선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1년 고등고시위원, 서울대학교 강사, 1953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954년 서울시사편찬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여생을 마쳤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