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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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Dosim Soge Ganjikdoen Chueokdeul, Yonginui Jaerae Sijang |
영어의미역 | Traditional Market in Yongin Brought Back Fond Memories at the Downtow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양화 |
[개설]
오일장은 전국 각지에서 닷새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재래시장을 말한다. 용인 지역 역시 산업화로 인해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기 이전, 즉 전통적 농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1960년대 말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였던 용인장(김량장)을 비롯하여 백암장, 원삼장, 송전장, 모현장 등은 용인 지역의 대표급 재래시장이었다.
2009년 말 현재 백암장과 용인장을 제외하면 기존의 오일장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는 오일장을 찾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백암장은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의 집중으로 인한 변화 속에서도 전통 장의 모습을 잃지 않고 활발한 장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용인 지역 오일장의 유래]
용인 지역에서 언제부터 오일장이 열리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산림경제(山林經濟)』, 또는 각종 ‘읍지’류 등을 통해 조선시대 중기 이후 장시(場市)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아래 시기로 내려올수록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오일장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여, 17세기 후반에는 5일 간격으로 열리면서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와 양지·죽산의 ‘읍지’를 보면 당시 용인 지역에는 용인현 소재지의 읍내장과 김량장, 남사 지역의 도촌장, 그리고 양지 방면의 개천장과 백암장이 있었다. 이후 개천장은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그대로 계속되어 오다가 도촌장이 사라지고, 현대에 들어와 송전과 원삼, 모현 지역에 새로운 모습의 재래시장이 서기도 하였다.
오일장은 한 지역에서 한 달에 여섯 번을 서게 되지만 큰 마을 단위로 서게 되므로 한 시군(市郡)에서 보통 세 군데나 많으면 네댓 군데서 날짜를 번갈아 가면서 선다. 용인시를 한 구역으로 본다면 한 달 내내 장이 옮겨 다니면서 열려서, 한 달 중 20일 이상은 용인 지역 어딘가에서 장이 선다는 이야기가 된다. 흔히 오일장에는 장이 서는 지역의 지명과 붙는 날짜가 따라다니게 된다. 용인장은 ‘열흘닷새장’이니 1일과 5일에 서는 장이고, 백암장은 지금도 ‘엿새하루장’이요, 모현장은 예전에 ‘아흐레나흘장’으로 불렸다.
용인 관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일장은 물론 용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인장은 정확히 말하면 김량장(金良場)인데, 지금의 처인구 김량장동에 서던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김량천은 과거에 용인 고을과 양지 고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하천으로, 현재의 자리에 오일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교역의 중심이 되고 인구의 집중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지금의 기흥구 마북동(옛 구성읍소재지)에 있던 용인군청이 옮겨 오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명에서조차 김량장이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김량장의 발전과 성장은 오일장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가장 전통적인 오일장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처인구 백암면 백암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이다. 백암장은 과거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던 시기에 용인은 물론이고 인근의 안성과 이천 일부 지역에서도 찾아왔을 정도로 규모와 위상을 자랑했던 장이다. 또 기록을 살펴보아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이미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2백여 년은 훨씬 넘었는데, 기록 이전에도 장이 섰다고 감안하면 연대는 더욱 올라갈 것으로 생각된다.
[오일장의 풍경]
예부터 장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속담 중에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남이 장에 가니 나도 내년 농사에 쓸 씨앗을 짊어지고 뒤따라간다는 말이니, 이보다 더 오일장과 관련하여 실감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장날이 돌아오면 볼일이 없어도 장에 가는 이들이 많았기에 생긴 말일 듯싶다.
지금도 평소에는 조용하던 농촌 마을이 장날만 되면 아연 활기를 띠는데, 옛날에야 더 말할 게 있을까 싶다. 장터에 이르는 길은 곡식자루나 닭, 달걀, 채소 등등 평소에 애써 기르고 생산한 것들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혹은 소나 마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지금은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또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어느 오일장이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세상 돌아가는 뉴스도 시시각각 알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옛날의 오일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물론이요, 세상물정을 알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알리는 역할도 중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정보를 교환하는 마당이요 여론을 형성하는 터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웃마을의 친구나 건넛마을의 사돈을 만나면 으레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안사돈의 안부에서 시작해서 기르는 송아지의 상태까지 꼬치꼬치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과년한 사돈처녀의 중매도 이루어지고 남편 잃은 과부의 재취자리가 성사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오일장이란 게 없는 게 없고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는 곳이었던 셈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불구경이라고 하는데, 장날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싸움판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주었다. 물건값을 흥정하다 싸움이 난 경우도 많았지만 역시 아침부터 들이붓는 막걸리가 주범인 경우가 많았다.
싸움판이 벌어지면 눈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을 하는데, 심지어는 어느 한쪽을 응원하는 풍경도 벌어졌다. 그러나 장마당에서 시작된 싸움은 장마당에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함께 어깨동무하고 주막에 들어가 다시 한 잔 걸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해장술에 취하면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는 다소 듣기 거북한 속담도 있듯이 장날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이 해장국집이었다. 그 중에도 선지해장국이 인기였는데, 백암장의 경우는 순대국이 유명하여 이제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표 상품이 되어 있다. 지금은 자가용을 타고 오가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버스도 없어 걸어가는 게 다반사였다.
그리하여 장터에 도착하면 벌써 허기가 지니 발길은 자연스레 선짓국집이나 순대국집으로 향하게 된다. 순대국에는 으레 막걸리를 곁들이게 되고, 더러는 어제 먹은 속풀이를 하다가 아예 또 한 판 벌이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장꾼들 또한 몫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터라 해장국으로 요기부터 해야만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더러 전장(前場)에서 허탕이라도 쳤다면 아침부터 막걸리에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장국집들은 대폿집으로 더 많이 불렸는데, 술이라야 막걸리가 전부였다. 커다란 대접에 막걸리 한 대접을 들이키면 저절로 배가 불러 왔고, 안주야 김치쪽이나 왕소금이 전부였으나, 어쩌다 돼지비계라도 얻어먹는 날이면 그날은 정말로 운수 좋은 날이 되곤 하였다.
장사꾼들의 대부분은 마수걸이라고 해서 첫 번째로 물건을 사는 손님에게는 값도 많이 깎아 주고 인심도 후하게 썼다. 첫 손님을 놓치면 하루 종일 장사가 안 된다고 하는 속설 때문이었다. 하루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떨이의 폭이 점점 후해지는 것 또한 장날이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운 추억이다. 아예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파장 무렵 장을 보러 나오는 경우도 있었으니, 많은 물건을 떨이에 싸게 살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선과 같은 신선도를 요하는 물건들은 잘 사야 본전인 경우도 많았다.
당시 농촌 지역에서 가장 큰 돈은 뭐니뭐니해도 황소를 판 돈이었다.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일 년 내내 기른 황소를 팔아 자식들의 대학교 등록금을 대던 시절이었다. 아들의 대학 등록금이나 딸의 혼수로 쓰기 위해 힘들게 기른 소를 장에 끌고 나와 판 뒤, 모처럼 마신 몇 잔의 막걸리 때문에 거리나 차 안에서 ‘쓰리꾼’이라고 불리는 소매치기들한테 ‘쓰리’를 당했다면 넋이 나가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일 터이다.
그렇듯 장날이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장터를 헤매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쓰리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또한 장터였다. 이러다 보니 소 판 돈을 전대를 만들어 허리춤에 차고 가거나, 아예 가족이나 이웃을 보디가드로 대동하고 나오는 등 안전에 대한 방책 또한 나날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김량장의 우시장 또한 적잖은 규모였으나 백암장의 우시장은 따를 수 없었다. 소를 사기 위해 경상북도 영주나 상주에서까지 소상인이 올라왔을 정도로 백암장은 근방에서 가장 큰 우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우시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백암장은 백암면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즐김의 장소, 회포를 푸는 장소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우시장에는 전문적으로 소를 흥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소를 팔고사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고 중간에서 수수료를 받는 거간들이었다. 또한 장날이면 소를 여러 마리 사다가 콩이나 사료와 같은 양질의 사료로 비육(肥育)하여 다음 장에 내다파는 이들도 있었다. 즉 소를 싸게 사서 다음 장에 가져가 비싸게 파는 식이었는데, 며칠 새에 집중적인 관리가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용인장(김량장)에는 ‘사길’이라고 불리는 푸줏간주인이 있었는데, “사길이, 고기 한 근 썰어라.”고 하면 저울눈금이 바들바들 떨 정도로 박하게 주고, “김주사, 고기 한 근 주시오.” 하면 두 근은 됨직하게 썰어 저울눈도 보지 않고 주었다고 한다. 박하게 한 근 산 사람이 “똑같은 한 근인데 내 것은 왜 적으냐?”고 따지자, “그것은 사길이한테 산 거구요 저것은 김주사한테 산 거예요.”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반상(班常)의 그림자가 남아 있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던 시절의 이야기로, 지금도 용인 지역에서는 널리 회자되고 있다.
우시장에 가려져 있었지만 싸전 역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장터의 한 축으로 움직였다. 특히 백암이나 원삼의 벼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해 멀리 수원이나 광혜원에서까지 장사치들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또, 당시에는 장에 갈 때 으레 돈보다 쌀이나 여러 가지 곡식을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쌀을 시장이나 장사꾼에게 팔아넘길 때는 “쌀을 산다”고 했고 시장이나 장사꾼으로부터 쌀을 사서 집으로 가져올 때는 “쌀을 팔아 온다”라고 표현했는데, 국어시간이면 한참씩이나 설명을 듣던 추억이 새롭다. 아마도 아침에 만나면 첫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로 시작되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장터에는 고무신이나 장화를 때우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어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무신의 찢어진 부위를 깊고 다시 고무풀을 바른 뒤 생고무를 덧붙여서 불에 달군 기계 위에 압착시켜 때우는 방식이었다. 어쩌다가 너무 오래 누를라치면 고무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하기도 했는데,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장터의 풍물이 되었다.
지네와 같은 한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오면 음담패설에 가까운 구수한 입담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면 과장된 약효를 자랑하며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끔씩 애들은 들어서는 안 되니 집에 가라는 말도 양념처럼 곁들이면서 말이다. 양잿물을 파는 장사꾼도 있었다. 양잿물은 길쭉길쭉하고 눈처럼 하얀 덩어리로, 집게로 덜어서 팔았다. 양잿물을 넣어 빨래를 삶으면 때가 잘 져서 많이들 사용했다.
엿장사가 들려주는 구수한 장타령도 인기였다. 하얀 엿은 어린애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으며, 엿에 묻은 흰 가루는 집에서 만들었던 엿의 콩가루와 달라서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른들은 엿치기를 했는데, 엿을 부러뜨려 구멍이 큰 엿을 내미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였다. 구멍이 비슷하면 서로 자기 것이 크다고 우기다가 지나쳐서 주먹다짐까지 가기도 하고, 열받는다고 계속하다 엿장수 좋은 일만 시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추석이나 설 전에 특별히 서는 장을 대목장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추석이나 설 차례상에 올린 제수를 장만하기 때문에 평소에 사지 않던 고기나 생선 등도 아울러 사야 한다. 장날이 대목장과 겹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에 가는 버스를 타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특히 설날 밑의 대목장에는 후추를 갈아서 파는 장사도 있었다. 지금은 후춧가루가 흔하여 기본적인 양념의 하나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설날에 떡국에나 조금씩 뿌리는 진귀한 양념이었다. 워낙 비싸고 귀하다 보니 가짜도 있어서 이를 진짜라고 증명하기 위해 통후추를 즉석에서 갈아 주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단오나 백중 때도 장이 성대하게 열렸는데, 특히 백중이 유명했다. 음력 7월 7일을 전후해서 백중장이 서면 여기저기서 씨름판이 벌어지고 두레패가 흥겹게 놀았다. 특히 백암장의 경우 사당패가 찾아와 판을 벌이기도 하여 풍물이나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백중장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평소에 서는 장에 비해 볼거리나 놀거리, 먹을거리가 넘쳤기 때문이다. 특히 씨름의 경우 황소가 상으로 걸려 있기도 했는데, 후에 규모가 줄어들면서 송아지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백암장은 20여 년 전까지도 7월이면 씨름대회를 개최하여 용인 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멀리 충청북도에서도 장사들이 찾아왔다. 지금처럼 프로 씨름대회는 아니어도 씨름대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다니며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여러 차례 황소나 송아지를 타 여러 고을에 이름을 떨친 이들도 적지않았다.
[오일장의 상인들]
오일장의 주인들은 물론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나, 이장 저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꾼들 역시 오일장을 꾸려 가는 주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장꾼들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략 나눠 보면 다음과 같다.
o난전상인: 점포가 아닌 빈 장소를 찾아 자리를 깔고 물건을 파는 상인
o맥장꾼: 장날 특별한 일 없이 나온 사람
o잠상: 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금지된 품목을 판매하는 상인
o마병장수: 철이 지나 헐고 값이 싼 물건을 파는 상인
o어리장수: 닭이나 오리를 어리에 넣어 파는 상인
o시겟장수: 곡식을 마소에 싣고 다니며 파는 상인
o거리목장수: 최근 들어 버스정류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
o듣보기장수: 물건을 사거나 팔지 않고 시세만 살피며 돌아다니는 사람
시대가 변하고 장터에서 팔리는 물건도 달라져 장사하는 방식도 달라졌으니 위의 구분도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장마당에서 팔리는 상품의 대부분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들이다. 또 나무로 만들었던 도리깨와 싸리삼태기가 플라스틱으로 변하는 등 재료와 만드는 방식의 변화를 거친 상품들도 대거 등장하고 있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거나, “둘도 많다”고 외치며 장날이면 거리에서 가족계획을 홍보하던 때가 엊그제인 것 같은데,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베트남 신붓감을 홍보하는 사람들이다.
[오일장을 추억하며]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도시화되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용인의 오일장 역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용인장의 경우 상인들이 계속 증가하여 금학천을 따라 역북동 초입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사라졌던 모현장이나 송전장·원삼장 등이 다시 서고 있다. 백암장 역시 전통을 지켜 가면서 지속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따르듯, 이는 용인 관내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과거의 오일장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새로운 형태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세대가 오일장에 대한 같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에게 오일장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용인 지역의 오일장은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가겠지만 옛 오일장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