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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81
한자 孫機錫
영어공식명칭 Son Ki-seok
이칭/별칭 손기석(孫其錫),손기석(孫基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규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3년 10월 25일연표보기 - 손기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손기석 밀양 태룡리 장터 만세 운동 참가
몰년 시기/일시 1925년 5월 23일연표보기 - 손기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손기석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원서리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지도보기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손기석(孫機錫, 孫其錫, 孫基錫)[1893~1925]의 본관은 일직(一直)이고, 손경헌(孫庚憲)의 족질이다. 손기석은 1893년 10월 25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였던 한용운은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내려보냈다. 이에 통도사 승려 5명이 3월 20일 표충사를 방문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 장터에서 장이 열리는 날로 결정하였다. 4월 4일은 용회동 장터 장날이자 사명대사 춘향일이기도 하였다.

손기석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의 부탁으로 원서리 주민들을 모으는 한편, 1919년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장터 만세 운동[용회동 장터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손기석박권하(朴權夏), 장만식(蔣萬植), 장인식(張璘植) 등의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태룡리 헌병주재소(憲兵駐在所) 건물이 부서지고 헌병군조는 시위 군중에게 맞아 쓰러졌다. 밀양의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 헌병과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시위 군중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손기석은 해산 과정에서 시위 군중 36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손기석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손기석은 계속 일본 경찰에게 예비 검속을 당하다가 1925년 5월 22일 부산검사국 밀양분국의 호출로 밀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고, 그 다음날인 5월 2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손기석에게는 2011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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