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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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영어의미역 | Religion |
분야 | 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은 유교, 불교, 천주교 및 개신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러 신흥종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종교가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는 지역이다. 특히 지난 100년은 초반에는 국가와 민족이 존망의 기로에 섰던 시기였으며, 후반에는 근대화를 통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희망찬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황도유학, 황도불교,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면서 유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등 한국종교계를 탄압했으나 논산 지역 종교인들은 그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종교 발전은 물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제거하는 노력을 지속하면서 인재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논산 지역 종교계의 고난과 발전 과정을 유교, 불교, 개신교, 천주교 및 기타 신흥종교로 나누어 살펴본다.
[유교]
1. 논산의 유교문화와 유학자
한국의 전통문화를 형성하는 데 유교의 역할은 어느 종교나 사상보다 강하였다. 특히 논산인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 사상과 그 선비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17~18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사조로 인하여 한국의 전통 문화와 가치관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지만 효와 충을 생활의 기본 덕목으로 삼아 온 논산의 선비정신은 오늘날에도 존중되어 논산인의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논산 유교문화 유산은 조선 중·후기의 한국 예학을 주도했던 김장생, 김집, 윤증 등의 유서와 전통이 깃든 곳으로 내면적 특징과 지성적 품위를 지니고 있다. 논산 지역은 기호학파의 중심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는데, 기호학파 가운데 율곡 이이의 적통을 계승하는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모두 논산 지역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의 예학과 의리학을 대표한 자들로 정치·문화·학술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송시열의 수제자였다가 후에 노·소 분당이 이루어지면서 갈라선 명재 윤증도 논산 지역의 큰 학자이다.
그들의 예학과 의리 사상은 중세 봉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느 한 시대의 특수한 이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참다운 삶을 추구하며 인간 사회 전체의 평화와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주의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논산의 유학자들은 구한말 이후 근대의 격변기 속에서도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후진을 교육하여 참다운 인도주의를 계승하는 노력을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보여주었다.
2. 현대 논산의 유교
광복 이후 유교계를 대표하는 조직은 성균관·향교·유도회 등이다. 광복 이후 유교계는 친일단체를 제거하는 한편 난립하던 유교단체를 통합하여 일제가 격하시킨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성균관의 교화사업 추진기구인 유도회를 결성하였다. 현재 논산에서도 이와 관련된 유림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논산유림회의 회원은 주요 향교의 전교, 유도회장, 장의, 고문, 유도회원, 청년유도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
논산 지역의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 주로 국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관음신앙, 미타신앙, 약사신앙 등 개인의 구제에 중점을 두는 대중신앙도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논산 지역의 불교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화엄종을 바탕으로 하는 개태사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관촉사의 창건으로 새로운 모습을 얻게 된다. 개태사는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물리치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게 되자 이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찰이다.
관촉사는 968년 왕명을 받아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 만인 1006년에 완성되었다. 관촉사는 고려시대 논산 지역의 미륵신앙을 선도해 나갔고, 그에 따라 미륵신앙은 전 시대에 걸쳐 번성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에 조성된 사찰로는 논산 송불암 사지, 논산읍의 대정운사 사지, 부적면의 영은사 사지, 가야곡면의 정토사지, 상월면의 용화사지, 노성면의 도림사지와 호암리 사지 및 송당리 사지, 광석면의 항월리 사지와 중리 사지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화엄종과 미륵신앙이 중심축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논산 지역의 불교계에 약간의 변화 분위기도 나타났다. 그것은 고려 충숙왕 때의 명필인 이암의 발원으로 조계종의 쌍계사가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성된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에 불탔다가 조선 영조 때에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산 지역의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대부분이 조계종 도량으로 나아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에 조성된 사찰로는 노성면의 노티리 사지, 광석면의 득윤리 사지, 두마면의 입암리 사지, 상월면의 지경리 사지, 부적면의 아게울 사지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개신교]
개신교의 논산 전래는 논산제일교회를 개척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맥길(William B. McGill)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인이 주도하였으며 주로 공주 지역의 교회, 선교사, 전도자들에 의해 많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개신교 교파 중 감리교회가 특히 많이 개척되었으며 장로교의 경우 광복 이전까지 논산 지역에서는 선교활동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논산 지역에는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창립되었으며,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주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함은 물론 주민들의 민족의식 배양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논산 지역의 사회 발전 및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논산 지역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크고 작은 탄압이 일제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개신교의 저항 역시 만만찮았다.
광복과 더불어 논산의 개신교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대한감리교 논산제일교회, 대한감리교 양촌교회, 대한감리교 이화교회, 장로교 논산중앙교회, 장로교 논산교회, 장로교 제일중앙교회, 성결교 논산교회, 성결교 병촌교회, 침례교 강경침례교회, 연무그리스도교회 등이 주축이 되어 유아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 활동과 사회복지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천주교]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이후 천주교회가 논산 지역에 전파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를 겪으면서부터이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를 견디면서 공식적으로 이 지역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것은 1880년대 초인데, 1883년의 삼산리공소와 1884년의 강경공소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논산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충청도와 경기 지역에서 거주하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지점인 산악지대에 살았던 자들이며, 1886년의 한불조약체결 이후 천주교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약화되자 생업을 위해 마을로 내려오면서 은진 지역에 여러 공소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1897년 베르모렐 신부가 부임하면서 화산(나바위)본당이 창설되어 은진 지역의 공소들은 화산본당과 미알롱 신부가 맡고 있던 고산(되재)본당으로 나뉘어 소속되었다. 당시 나바위 소속 공소는 모두 21개(은진 10, 여산 4, 용안 3, 석성 2, 연산 1, 노성 1), 되재 소속 공소는 모두 24개(고산 17, 진산 2, 진잠 2, 은진 2, 연산 1)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1907년에는 화산본당 관할 지역에 놀뫼공소가 설립되면서 1921년 논산본당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1911년 한국 천주교회는 교세의 확장에 맞추어 조선 대목구(교회의 관할 지역 단위)를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를 관할하는 대구 대목구와 기타 지역을 관할하는 서울 대목구로 분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진 지역 공소를 관할하던 화산(나바위) 본당과 고산(되재)본당은 대구 대목구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본당에 소속된 공소와 신자들은 행정구역상 서울 대목구 소속이나 해당 지역에 사제를 모신 본당이 없어 교회 내에서는 대구 대목구 소속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0년에 걸친 이러한 갈등은 1921년 화산(나바위)본당에서 논산본당(현 논산부창동성당)이 분리됨으로써 해결되어 행정구역과 교회의 관할 구역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후 강경 지역의 교세가 확장되어 1945년에는 논산본당에서 강경본당이 분리 설정되었다. 일제 말기까지 충남 지역에는 12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그 중 2곳이 논산 지역에 있었다.
또한 논산본당으로부터 1946년에는 강경본당, 1958년에는 연무본당, 1975년에는 대교동본당, 2004년에는 논산내동성당이 각각 분리됨으로써 해방 이후 논산 지역의 본당은 논산본당을 포함하여 모두 5개로 늘어났으며 신자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논산 지역 성당들의 활동은 육영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중 교육 사업에 대하여 살펴보면, 논산본당(현 논산부창동성당)을 설립한 후 제2대 주임신부였던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1926년경에 무인가로 학교를 세우고 박마리아 선생이 아이들에게 유치원 과정을 가르쳤다.
1933년 넘쳐나는 학생의 수용을 위해 교실을 증축하여 유치원 수준을 넘어서는 소화학원을 세워 소학교 미취학자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화학원의 운영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논산 분원의 수녀가 맡아 하였으며, 초등학교 저학년 위주의 교과 과정을 설치하여 졸업 후 이들 중 일부가 논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이나 3학년에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당에서 이러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학생 수가 증가하였다. 이에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들을 증파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후 7명의 수녀들이 보통학교와 동일한 교과과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특히 1930년대 일제의 침략정책으로 공립보통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한글교습시간도 설정하여 지역민에게 크게 기여했으나 1944년 일제 말기의 극악한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 그 전통이 살아남아 논산대건중·고등학교와 쌘뽈여자중·고등학교로 다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 박해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시선을 사회의 그늘지고 어두운 곳으로 향하였다. 이후로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헌신은 한국 천주교회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논산 지역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기관으로 논산시 은진면 교촌리에 있는 쌘뽈요양원과 논산시 광석면 율리에 있는 성광원, 논산시 상월면 대촌리에 있는 성모의 마을 등이 있다. 이중 쌘뽈요양원은 1952년 논산본당의 문전에 쓰러져 있던 무의탁 노인 한 분을 거두어 임종과 장례를 치른 오채경 수녀의 선행이 지역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양로원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논산본당의 제8대 주임신부였던 성재덕 신부가 1953년 현재의 쌘뽈여자중학교와 쌘뽈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양로원을 시작하였다. 이후 1965년 천주교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인가 받은 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운영을 맡고 있다. 처음 양로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입소대상자인 여자 어르신들에게 치료 및 요양과 기타 일상생활의 수준 높은 보살핌을 위하여 2002년 양로원에서 요양원으로 시설변경을 인가 받고 2003년 부창동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성광원은 1956년 논산본당의 성재덕 신부가 당시 정착지를 얻지 못한 채 떠돌고 있던 음성 나환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강경에서 거처를 구하고 날짜를 정해서 나이동진료반이라고 부르면서 치료와 구호를 시작하였다. 1957년 12월 논산본당의 평신도들이 성재덕 신부의 후원을 얻어 전후 논산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음성 나환자들을 모아 광석면에 건물 5채를 지어 정착하도록 하고 양생원이라 불렀다.
성모의 마을은 일본 성모의 기사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중증 장애인의 보호와 지적장애인의 재활 시설 설치 사업 등을 목적으로 1992년에 법인 설립을 인가 받고 준비 과정을 거쳐 1995년에 건립하였다. 2011년 7월 기준 원장 1명, 사무국장 1명, 생활재활교사 42명 등 총 53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고, 정원 85명 중 현원 85명이 생활하고 있다.
[신종교]
논산 지역에는 정역계, 동학계, 유사 불교계, 원불교계, 단군교계, 기독교계, 증산도계, 천지대안교, 무속계, 정도교, 일심교 등과 같은 신종교들이 조선 말기 이래로 계룡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민심을 끌어 모으기도 했으나 현재는 많이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