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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78
한자 義兵 運動
이칭/별칭 의병 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창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5년 - 을미사변 후 의병 운동 촉발
종결 시기/일시 1910년 - 한일합병
발단 시기/일시 1907년 8월연표보기 - 군대 해산
전개 시기/일시 1907년 11월 - 이인영, 관동 창의대장이 되어 의병 부대 통합
전개 시기/일시 1907년 12월 - 13도 창의대진소 발족
전개 시기/일시 1908년 12월 - 연합 의병 부대의 대일 투쟁 본격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월 28일 - 이인영 부친 별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3월 - 장인환·전명운이 친일 고문 스티븐스 사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2월 - 강기동 체포, 처형
발생|시작 장소 의병 운동 - 경기도 양주시
종결 장소 의병 운동 - 경기도 양주시
성격 국권 회복 운동
관련 인물/단체 허위|윤인순|이은찬|정용대|연기우|지홍윤|박종한|강기동|조인환

[정의]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경기도 양주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으킨 국권 회복 운동.

[역사적 배경]

의병 운동은 1894년 발발한 갑오 농민 운동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한 이후 20여 년간 전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과 투쟁의 강도가 강화되었다. 군대 해산 이전에는 이인영(李麟榮)·최익현(崔益鉉)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 의병장이 의병 운동을 주도하면서 반일 항전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907년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 평민, 몰락 양반 등이 참여하여 의병 운동을 전국적·민중적 항일 운동으로 이끌었다.

양주군을 비롯한 경기 지방의 의병 역시 일제가 토벌 공세를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일 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유생 의병장에서 평민 의병장으로의 확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의병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각지의 의병 부대는 연합 전선을 형성하였다. 당시 일제의 근거지이자 부일(附日) 정권의 소굴인 서울을 공격하여 탈환하는 것이 의병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경과]

경기도 양주군은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사람과 주변 물산이 모이는 중심 지역이었다. 따라서 양주군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면서 그들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던 경기 의병들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고, 의병 운동의 주요한 활동 무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경기 지방에서 의병 운동이 본격화된 시기는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였다. 허위(許蔿)의 의병 부대가 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과 상응하는 등 중부 지방의 의병 부대는 독립적인 의병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 부대 간에 상호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연합 의병진을 구성, 서울로 진입하여 국권을 탈환하고 일제를 몰아내자는 연합 의병 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13도 의병 통합군인 13도 창의대진소를 설치하고 서울로 진공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인영은 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전국 의병이 경기도에 집합하여 연합 의병 부대로서 함께 나아갈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원주를 중심으로 인근의 의병 부대를 통합하고, 자신이 관동 창의대장이 되었다. 전국의 의병장과 의병 부대는 경기도 양주에 모여 들었다.

양주에 모인 의병은 48개 의병 부대로 약 1만 명에 달하였다. 1907년 12월 양주에 모인 각 의병장들은 회의를 열어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 의병을 발족하고,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을 13도 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허위, 민긍호, 이강년 등 당시 전국 각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을 망라하였다. 13도 창의대진소의 선봉대는 허위의 지휘 하에 약 3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서울 동대문 밖 약 12㎞[3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어 오기로 한 이인영의 후속 본대와 각도 창의대장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결국 퇴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의병장 김규식·연기우(延基羽)가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후군의 도착이 지연되고 일본군의 사전 대비 등으로 선봉대가 퇴진하는 등 진공 작전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1908년 1월 28일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 별세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귀향하였다.

13도 연합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와 함께 13도 창의대진소가 해체되고, 의병장들은 각기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나 의병 운동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이 친일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를 미국에서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은 항일 운동의 기운을 다시 전국적으로 확산시켰고, 적극적인 전투가 이루어지고, 세력 또한 확대되어 갔다.

경기도 각 지역으로 분산되었던 의병 부대는 상호 연계에 의한 연합 활동을 모색하였고, 연합 의병 부대의 대일 투쟁은 1908년 12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활발하게 의병 운동을 벌인 의병 부대는 허위 의병 부대, 윤인순(尹仁淳) 의병 부대,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 그리고 군인 출신 의병장으로 정용대(鄭用大)[정교]·연기우[부교]·지홍윤[부교]·박종한(朴宗漢)[특무 정교] 의병 부대, 기타 강기동(姜基東)조인환(曺仁煥) 의병 부대 등이다.

[결과]

양주 의병은 일제와 매판적 친일 세력을 상대로 벌인 실제 투쟁 과정에서 자신들이 지향한 반봉건·반침략 항쟁의 성격을 드러냈다. 비록 그것이 명확한 강령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의병들이 투쟁 과정에서 내걸었던 격문이나 투쟁의 대상에서 그들의 이념적 지향이나 투쟁의 방향을 일정하게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양주 의병은 일제가 조선에 대한 전일적인 지배를 획책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의병 대열에 참여하였던 반일·반침략 민족 운동이었다.

또한 양주 의병이 보여준 지주·부민층에 대한 반봉건 항쟁은 방곡령의 실시에서 드러나듯이 ‘농민 경제의 보호,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자립, 농촌 소상인과 농촌 시장의 보호’ 등을 달성하려고 시도하였다. 국내의 의병 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는 속에서 경기 의병들은 양주를 중심으로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 가운데는 박종한·홍원유(洪元有)처럼 일제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자수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제가 한일합병을 선언한 1910년 8월 후에도 의병장 연기우·강기동·전성서(田聖瑞)·이한경(李漢景) 등은 경기도 양주·포천·삭녕·마전, 황해도 토산·금천·재령 등을 왕래하면서 각기 20~30명을 거느리고 일본의 대대적인 공세를 피하며 맹렬히 활동하였다. 특히 연기우 부대와 강기동 부대는 앞뒤에서 협격하는 관계를 이루며 각지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1910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일제의 경기·황해 지역에 대한 대토벌에서도 살아남아 끈질기게 항쟁하였다.

그러다가 연기우는 황해도 지역의 이진룡(李鎭龍) 의병 부대와 호응하여 함경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강기동도 국내에서 의병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북간도로 이동하던 도중, 1911년 2월 원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고, 양주를 중심으로 한 경기 지역 의병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2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의병 운동은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한 이후 외교권의 행사, 군대 해산과 경찰권의 장악, 차관 정치 등 한국 강점 정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시점에서 국가 존망의 시대적 위기의식을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분연이 일어선 민족 의지의 표징이었다.

13도 창의대진소의 조직은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중부 지역의 의병 부대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양주에 집합한 것은 허위 의병 부대의 근거지이기도 하였지만, 북부 지역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의병대의 근거지로 양주가 최적지였기 때문이었다.

정보 누출과 의병 부대 간의 연계 부족, 이인영 부친 사망 등의 이유로 진격 작전이 실패한 이후에도 결국은 그를 주도했던 의병 부대를 중심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 투쟁을 지속하였고 투쟁 형태에 있어서도 분산과 연합을 전략적으로 펼쳐 나갔다.

양주 의병은 성격적인 면에서 다른 지역의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이 드러내는 반침략, 반봉건적인 성향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양주 의병은 일제 침략 세력에 기생하는 매국적 관료나 일진 회원, 순사 보조나 헌병 보조원등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처단 또는 압력을 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매판 정부의 조세 수탈을 일제의 침략과 동일시하고 그를 저지하는 것을 반침략 운동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지주에 대한 반봉건 투쟁과 양주 주민들의 적극적인 도움 속에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의병 항쟁사에서 괄목할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시작된 의병 운동이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된 국권 회복 항쟁 과정에서 양주군은 경기 지역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1908년 13도 연합 의병 조직 시 서울 진공 작전의 본부 지휘소이며 집결지로서, 우리나라 의병 항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로 불타오른 의병 운동은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조선 후기 이래 쌓여온 봉건적·민족적 내부 모순을 해결하려고 나선 반봉건·반침략 민족 운동이었다. 특히 통감 정치 아래 진행된 조선 사회의 식민지로서 재편 과정이라는 외부적 모순까지 가세되어 의병 운동은 민족적·민중적 항쟁으로 발전하는 객관적 요인이 되었다.

결국 경기 양주 지방의 의병 운동 역시 이러한 객관적 요인을 배경으로 일어난 전체 의병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인식을 통해 일제가 한일합병을 선언한 뒤 항일 구국 의병 운동이 약화되는 가운데서도, 양주 의병은 1911년 2월까지 격렬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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