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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510
한자 美軍政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9월 7일 - 미군정 실시 선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미군정 종식

[정의]

1945년 9월 7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미군이 경기도 양주를 포함하여 남한을 통치한 시기.

[개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복하면서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이 분할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38도선 이남에 대해서는 태평양 미육군총사령부 총사령관 맥아더가 1945년 9월 7일 ‘조선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사령부 포고 제1호를 발하여 미군정 실시를 선언하였다. 이어 9월 8일 미 제24군단장인 하지 중장이 재조선미군사령관으로서 9만 7000명의 병력과 함께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9월 9일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의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았으며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을 조직하고 아놀드 소장을 미군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9월 19일에는 공식 명칭을 군정청으로 확정하였다.

[미군정기의 양주]

미군정청의 시정 방침을 보면, 군정청에 대해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 기간에 있어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지역을 통치, 지도, 지배하는 연합군 총사령관 아래 미군에 의하여 설립된 임시 정부라 못 박았으며, 남한의 유일한 정부로서 한국의 복리 상 견실한 정부와 건전한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미군정청은 명령에 순응하지 않으면 독립의 날을 지연시키고 처벌을 받는 원인을 만들 뿐이라고 했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인민공화국, 해외 임시 정부 등을 전면 부정하였다. 또한 지방의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등에 대한 해산을 명령했으며 일제 때의 관료 기구 및 경찰 기구를 부활시켰다. 이는 양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양주 지역에서는 양주군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으며 여러 정당과 정치 단체들도 있었다. 특히 사회주의 세력의 조선공산당 양주군당이 두드러졌으며 지주·자본가층이 중심이 된 한민당 관련 세력도 있었다. 미군정청은 양주 지역 내 모든 국공유 재산과 대화방적회사 창동공장 등 일본인 사유 재산을 미군정청과 결탁한 관료 및 기업가들에게 불하하였다. 이를 통해 양주 지역의 경제 구조가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기 가장 큰 쟁점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정부 수립 문제였다. 이와 더불어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는 1948년 8월 15일 전후에 이르기까지 양주 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단독 선거 실시와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총파업과 시위를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맞서기 위한 무장 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인 양주 지역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전 영역이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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