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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언백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763
한자 高彦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영원 군수
활동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양주목사, 경기방어부사
몰년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고언백 사망
출생지 교동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부임|활동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제주
대표 관직 양주목사

[정의]

양주목사를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무신.

[활동 사항]

고언백(高彦伯)[?~1608]은 강화도 교동의 향리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軍官), 변장(邊將)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원군수(寧遠郡守)로서 대동강 등지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하지만 계속 분전하여 그해 9월 산간으로 왜군을 유인하여 62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양주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왜병 42명을 죽였다. 이에 임금은 고언백의 품계를 당상관으로 올리고 양주목사에 임명하여 광릉, 태릉 등 양주목에 있는 능침(陵寢)을 지키도록 하였다. 고언백은 양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험준한 산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으로 왜군을 무찔렀다. 또한 한때 왜군에 점거되었던 태릉도 무사히 지켜 냈다. 이에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경기도 방어사에 임명하였다.

고언백은 명나라 원군이 왔을 때 한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경기도 방어사가 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다. 한편 왕이 고언백의 노모와 가족에게 음식을 하사하였으나 고을의 수령이 제대로 전하지 않아 파직당한 일도 있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고언백임해군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심문을 받다 장형(杖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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