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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56
한자 李商在
이칭/별칭 계호(季皜),월남(月南)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0년 10월 26일연표보기 - 이상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신사 유람단 박정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 시찰
활동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우정국 주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84년 12월 4일연표보기 - 갑신정변으로 사임하고 낙향
활동 시기/일시 1887년 6월연표보기 -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의 2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감
활동 시기/일시 1888년연표보기 -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 후 낙향
활동 시기/일시 1894년 7월연표보기 - 학무국장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96년 2월연표보기 - 아관파천으로 사임
활동 시기/일시 1896년 7월 2일연표보기 - 독립협회 중앙위원과 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8년 2월연표보기 - 만민공동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 개혁당으로 몰려 2년간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07년 4월연표보기 - 신민회에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황성기독청년회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여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연표보기 - 신간회 초대 회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27년 3월 29일연표보기 - 이상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75년 8월 15일연표보기 - 이상재 추모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0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이상재 선생 생가지, 충남기념물 제84호로 지정
출생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추모비 이상재 추모비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생가 터 이상재 선생 생가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성격 독립운동가|정치가|청년운동가|종교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간회 초대 회장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정치가·청년운동가·종교운동가.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864년(고종 1) 강릉 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재(李商在)[1850~1927]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전통 교육을 받았다. 1881년(고종 18) 정부가 일본에 신사 유람단을 파견할 때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그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 우정국이 개설되자 우정국 주사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887년(고종 24)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조선의 자주 외교를 인정하지 않은 주미 청국 공사가 고종의 국서를 대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하자 이상재는 크게 분개하여 청나라 공사 관원과 담판하고 박정양 조선 공사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케 하였다. 이에 반감을 가진 청나라가 조선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여 결국 이상재는 1888년(고종 25)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學部) 학무국장이 되어 사범 학교, 관립 중학교, 관립 소학교, 외국어 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고, 외국어 학교의 교장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1896년(고종 33) 2월 아관파천으로 다시 관직을 사임하였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협회가 추진한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건설에도 관여하였다. 1898년(고종 35) 2월에는 만민 공동회 개최를 통해 러시아 등 열강들의 이권 침탈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고, 입헌 군주제로의 개혁 운동을 벌이다가 친러 수구파의 모략에 걸려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군중들의 강력한 요구로 10여 일 만에 풀려났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2년(고종 39)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으로 몰려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던 중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원로 회원으로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일제가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공작을 막았다.

1911년 황성기독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한 후 전국 순회강연을 나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불교청년회 및 천도교청년회 등과 친목회를 조직하는 데 노력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하자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그들을 만나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 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 세계 학생 기독교 청년 연맹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에게 탄압받는 한국 기독교 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조선기독청년회와 일본기독청년회의 분리를 결의케 한 다음에 이를 일본 측에 통고하여 조선기독청년회의 독립을 실현하였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에 추대되어 당시 민족주의 우파에서 제기된 자치론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가 창립될 때 이상재는 여러 번 사양한 끝에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동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는 4월 7일 10만 군중의 애도 속에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저술 및 작품]

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진평화(眞平和)』·『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청년회문답』과 『상정부서(上政府書)』1·2,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 다수가 있다. 이상재는 자신의 글을 통해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 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警句)로써 제어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인 1926년 11월 21일 이상재는 ‘조선 청년에게!’라는 제목의 연설을 레코드판에 녹음했는데,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그의 신념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여기에는 ‘남을 해롭게 말아라. 남을 해치지 말아라’라며 우회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자주독립의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육성이 7분 정도의 분량으로 담겨 있다. 이 레코드판은 이상재와 가까웠던 한 지인의 후손이 간직해 오다 2011년 7월 8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묘소]

본래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가 1957년에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썼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75년 8월 15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이상재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1990년 12월 31일 이상재 선생 생가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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