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함께하는 영덕의 대동놀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29
한자 傳統-盈德-大同-
영어공식명칭 Daedongnori of Yeongdeok-gun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행하던 집단 놀이.

[개설]

영덕 지역에서는 명절, 특히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마을 단위 혹은 마을의 여성들에 의한 달봉뛰기월월이청청과 같은 집단 놀이를 하였다. 달봉뛰기는 마을의 수호신에 대한 동제(洞祭)를 지낸 다음날 보름달이 뜨는 시각에 마을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먼저 당목(堂木)에 달봉을 전하여 복을 기원하는 경쟁적인 놀이이다. 월월이청청은 정월대보름을 비롯한 주요 명절 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에 의한 원무(圓舞)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겨루기와 놀이를 포함하는 집단적 가무 놀이이다.

[여인들의 달맞이 놀이, 달봉뛰기]

영덕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에 행하는 동제를 지낸 다음날 달맞이하기 좋은 마을 뒷산 등지에서 마을 수호신을 모신 제당에 먼저 달봉을 도달하게 하는 집단적 놀이를 하였다. 영덕 지역에서 달봉뛰기라 칭하는 이 놀이에는 일반적으로 노인과 여성 및 아이들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남정네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하는 놀이에 편을 갈라 응원을 하였다.

달봉을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제당에 먼저 도달하게 해야 하는 놀이인만큼 수호신에 대한 제사를 엄숙하게 지낸 다음날 대보름이 떠오르는 시점부터 놀이를 하였다. 마을마다 동제와 달봉뛰기의 방식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 형태는 유사하다. 남정면 남정리의 경우, 상리와 하리로 두 편을 갈라 동제를 지내기 전에 용기(龍旗)를 달 깃대를 준비하였다. 상리와 하리는 각기 황룡과 청룡의 기를 매달 길이 20여 미터의 깃대를 마련하였는데, 황룡과 청룡은 각기 총각과 처녀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정월대보름 자시 무렵에 제당(祭堂)에서 동제를 엄숙히 지내고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제관(祭官) 집에 모여 음복(飮福)을 한 뒤 깃대 주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되면 두 깃대를 합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 의식은 먼저 상리의 깃대를 하리로 옮겨 두 깃대를 새끼줄로 엮어 결합하는데, 이를 혼인시킨다고 간주하였다. 결합한 두 깃대를 다시 당목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깃대 합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깃대를 혼인시키면 곧이어 풍물패들이 풍물을 울리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사람들은 달봉뛰기 준비를 한다.

두 편으로 갈린 남정네들은 경험이 많고 달봉 투척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로 배치하여 겨루기를 위한 계획을 짠다. 이후 남정네들은 달봉재로 올라가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달봉뛰기를 준비한다. 달봉뛰기는 길이 60㎝, 지름 6㎝ 크기의 참나무 봉인 달봉을 동일한 출발점에서부터 투척하면서 서로 다른 경로로 목적지인 제당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각 편의 남정네들은 500m 정도의 거리에 30m 정도의 간격으로 사람들을 배치하였다.

각기 달봉을 받아 든 두 편의 남정네들은 달이 뜨는 것을 신호로 놀이를 시작하였다. 달봉을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여 목적지인 제당에 먼저 도착하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최후로 승부가 가려지기까지 매우 경쟁적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승부가 가려지면 양편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며 흥겹게 놀았다. 이때 양편의 풍물패가 하나가 되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우러져 놀았다.

다음날인 열엿새에는 풍물패들이 지신밟기를 하며 집집마다 돌아다녔으며, 열이레 날에는 합궁했던 양편의 깃대를 푸는 의식을 하였다. 이렇게 풀어 놓은 깃대는 상리와 하리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이 의식을 가리켜 신랑이 처가에서 혼례를 치른 후 삼일 후에 돌아가는 삼일우귀(三日于歸)인 셈으로 여겼다. 모든 의식을 마친 뒤 열여드레나 열아흐레에 대동회를 개최하였다. 대동회를 통해 한 해 동안 마을 일을 할 사람과 동제의 제관을 선정하고, 마을의 제반 사항을 논의하였다. 달봉뛰기는 격하게 봉우리에서 마을까지 봉을 날리고 달리며 벌이는 놀이이지만,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정초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의례적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월대보름이 뜨는 시각에 바다에서 뜨는 달의 상징성을 달봉을 통해 마을 공동체로 확실하게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달이 지니는 생생력(生生力), 즉 생명의 태생과 번식 및 풍요의 힘을 그대로 마을로 옮기고, 이를 통해 개개인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살필 수 있다. 생생력을 받아들이려는 경쟁이 다시 하나가 되는 대동단결의 실천으로 마을의 안정과 개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관념이 반영된 놀이로서 의의를 지닌다.

[밝은 달 아래 모여, 월월이청청]

월월이청청은 영덕 지역에서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여성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가무 놀이이다. 월월이청청의 기원과 유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침략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부녀자들이 가무를 펼쳤다는 것에서 유래된 월월이청정(越越而淸正)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이는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략 및 그 방비와 연관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다.

월월이청청의 구성과 의미에서 공민왕(恭愍王)[재위 1351~1374]의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 시에 왕비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부녀자들이 봉사한 안동 지역의 놋다리밟기나 경북 내륙 지역 일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애밟기와 유사한 점도 발견된다. 이 밖에 달이 청청한 밤에 춤추고 노래하며 논다고 해서 월월이청청(月月而淸淸)이 유래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월월이청청은 명절 놀이라 할 정도로 대보름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주로 행하였다. 근래에는 이월 초하루 영등날에 놀이를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달이 밝은 날에 즐긴 가무라는 기원설과 관련할 때, 대보름과 추석과 같은 명절에 행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월월이청청은 대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에 의한 가무 놀이였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였고, 가사와 생산 노동일 외에 가급적 여성들의 바깥 출입을 금하였던 전통사회에서 한밤중에 여성들의 집단 놀이라는 점에서 생소하면서도 일정한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예전부터 전승된 명절날 여성들의 집단 가무 놀이였지만, 통제가 엄한 가정이거나 반촌(班村)의 경우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놀이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월월이청청은 여러 놀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원무 외에도 달넘세, 절구세, 대문열기, 산지띠기, 동애따기, 재밟기, 실꾸리감기와 풀기, 콩받아라 등 일련의 다양한 놀이군을 포함하고 있다. 놀이패에는 앞소리를 잘 메기는 사람이 놀이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놀이패를 이끌었다.

월월이청청은 그 대형에 따라 원무형(圓舞型), 나선무형(螺旋舞型), 단선무형(單線舞型), 대선무형(對線舞型), 교차형(交叉型), 기타형(其他型)으로 나눌 수 있고, 경쟁의 유무에 따라 승부를 가리지 않는 자족형과 승부를 가리는 겨루기형으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월월이청청, 달넘세, 절구세, 대문열기, 송아지떼기, 동애따기, 재밟기 등의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월월이청청의 원무형은 강강술래처럼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우측으로 돌면서 진행된다.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점차 속도를 내면서 외발겹쳐뛰기로 바뀐다.

나선무형 놀이에는 달넘세와 실꾸리감기와 풀기가 있다. 달넘세는 원을 만든 뒤 옆 사람과 맞잡은 팔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 대표적인 형태이다. 참가자 모두가 원의 중심을 향해 둘러앉아서 옆 사람의 손을 잡는데, 이때 앞소리꾼의 구령에 따라 왼편의 사람과 그 옆의 사람이 맞잡은 손을 원의 안쪽 방향에서 바깥 방향으로 타넘기를 이어서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선 채로 달넘기를 하기도 한다. 실꾸리감기와 풀기는 실을 실꾸리에 감았다가 푸는 과정을 형상화한 놀이이다.

단선무형 놀이에는 재밟기, 산지띠기, 동애따기, 인줄 당기기가 있다. 재밟기는 모두가 한 줄로 늘어선 상태에서 허리를 높이고 치마를 덮어쓴 뒤에 앞 사람의 허리를 잡고 있으면 맨 뒤에서부터 차례대로 등을 밟아나가는 놀이이다. 재밟기는 안동 지역을 비롯한 경상북도 내륙 지역에서 하는 놋다리밟기나 지애밟기와 유사한 놀이이다. 산지띠기와 동애따기는 선두 뒤에 늘어선 사람들을 술래가 낚아채는 놀이인데, 사람들이 다 떨어지면 술래를 바꿔 진행한다. 동애따기는 서서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앉아서 하는 놀이이다.

대선무형 놀이에는 절구세가 있다. 절구세는 두 줄 또는 세 줄이 횡대를 이루어서 벌이는 놀이로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마주보고 선 두 열이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다.

교차형 놀이에는 대문 열기가 있는데,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대문 열기는 정해진 술래 두 사람이 마주보고 손을 맞잡은 뒤 높이 들어 대문 형상을 만들면, 앞장선 사람의 허리를 연이어 잡고 늘어선 이들이 교환창 형식의 노래를 주고받으며 그 밑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문 열기는 그 형태를 다양하게 변형하여 진행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월월이청청에는 콩심기, 깨금발싸움, 가마싸움, 게줄당기기, 인(人)줄당기기 등 다양한 형태의 놀이가 병행되고 있다. 이들 놀이는 특별한 절차에 준하지 않고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진행되었다. 콩심기는 '콩받아라'라고 하며, 참여자가 치마를 벌린 채 원형으로 둘러 앉아 콩이나 작은 돌멩이를 치마에 넣거나 넣는 시늉을 하는데, 이때 술래는 콩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방식의 놀이이다. 깨금발싸움은 두 편을 나누거나 두 사람이 깨금발로 상대방을 밀어붙여서 넘어뜨리는 놀이인데, 유사하게 오른발 또는 왼발을 반대편 손으로 잡고 벌이는 닭싸움도 벌였다. 가마싸움은 두 사람이 양손을 엇갈리게 잡아서 ‘井’ 자형의 가마를 만든 뒤 그 위에 사람을 태워 상대편과 싸움을 벌여서 먼저 땅에 떨어지는 쪽이 지는 놀이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편이 여러 채의 가마를 만들어 동시에 겨루기도 한다. 게줄당기기는 아이를 업을 때 쓰는 띠 또는 새끼줄을 이용하는 놀이이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엎드려 엉덩이를 마주한 상태에서 한 사람의 줄을 목에 건 뒤 사타구니 밑으로 통과시켜 주면 나머지 사람이 그 줄을 받아 목에 건 뒤에 각기 반대 방향으로 기면서 벌이는 겨루기이다. 인(人)줄당기기는 참가자를 두 편으로 나누어 각기 앞 장군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일렬로 죽 늘어서게 하고, 앞 장군들이 서로 팔을 건 뒤에 상대편을 끌어당기는 겨루기이다.

월월이청청은 명절에 행하는 놀이라는 면에서 오락성이 강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놀이와 축제가 지니는 의례적 측면을 잘 살필수 있다. 명절이라는 비일상의 의례적 시공간의 상황에서 금기시(禁忌視)된 여성들이 밤중에 행하는 놀이라는 점에서, 즉, 평상시 엄격히 통제된 여성들이 일상적 의무와 금기에서 벗어나 신명을 풀 수 있는 의례 공간으로서 놀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산지띠기, 동애따기, 실꾸리감기와 풀기, 게줄당기기 등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수행하여야 할 가사노동이나 생업과 관련된 성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놀이와 생업과의 관련성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보름의 달은 밤, 여성, 대지, 뱀이나 용과 연관되면서 풍요와 재생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생산의 능력이 가장 왕성한 젊은 여성들이 보름달 아래서 만물을 창조하는 대지를 밟으며 벌이는 놀이이며, 달이 차고 지는 과정과 뱀이 똬리를 틀었다가 푸는 것을 형상화한 놀이에서 공동체의 풍요와 가산을 기원하는 주술과 종교적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전통 계승을 위한 노력]

영덕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달봉뛰기월월이청청은 민속놀이 일반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속성을 간직하면서, 지역의 고유한 삶의 모습을 담지한 영덕을 대표하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대보름달이 지니는 생생력으로 대동단결하여 한 해를 함께 축원하고 공동체를 기반으로 풍요로움을 지향하였던 달봉뛰기월월이청청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대부분의 민속문화, 특히 집단으로 행하였던 민속놀이가 그랬던 것처럼 영덕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두 놀이도 일제강점기 동안에 중단되거나 약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일제강점기 말엽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심화되었는데, 8.15광복 이후 혼란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영덕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달봉뛰기월월이청청은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그 흔적과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며, 최근에는 새로운 복원과 전승의 기회를 맞기도 하였다.

달봉뛰기의 경우 1950년대에 중단되었으나, 지역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지명에도 남아 있다. 가령 남정면 남정리 같은 경우 달봉뛰기를 위해 오르는 구릉지대를 달봉재라고 하며, 축산면 경정리 뱃불마을에서는 예전에 달봉뛰기를 위해 오른 산을 월부산(月浮山) 혹은 달부고개라 하여 달이 떠오르는 곳 혹은 달뜨는 것을 바라보는 곳이라 한 것에서 이러한 흔적을 알 수 있다.

월월이청청의 경우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학계의 발굴을 위한 노력을 계기로 지역민들의 복원 노력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1982년에 지역사회에서 재연되었다. 10대 후반의 지역 여고생들에 전승된 월월이청청은 복원 이후 과거에 비해 연행 단위가 크게 증대되었다. 과거에는 많아야 수십 명 단위로 전개된 놀이가 수백 명 단위로까지 늘어난 결과이다.

영덕문화원에서는 2002년에 일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영덕월월이청청보존회’를 구성하여 영덕여자고등학교월월이청청을 전승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복원을 위한 노력의 결과 2003년에는 제44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마침내 2009년에는 영덕 월월이청청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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