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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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文化收容-象徵-安東-塼塔 |
영어의미역 | Symbol of New Cultural Accommodation, Pagoda in Andong |
이칭/별칭 | 모전탑,벽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명자(역사) |
[개설]
전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아 올린 탑으로,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인도에서는 예부터 흙과 돌을 쌓아 올려 묘를 쓰던 습관과, 거룩하게 여겨 기리던 곳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탑을 조성한 뒤부터 불교의 예배 대상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 인도에서는 사발을 엎어 놓은 듯 둥글고 크게 탑을 쌓아 올려 내부 공간을 만들고 한가운데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여 예배하였고,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높고 웅장한 목탑(木塔)으로 발전하였다가 다시 불에 탈 염려가 없고 견고한 벽돌로 된 탑으로 변화하였다. 나중에는 축조 과정의 문제와 탑 안에 들어가 예배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형식적인 탑이 조성되면서 오늘과 같은 여러 층으로 된 장엄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목탑이나 전탑보다는 석탑이 유행하여 현존하는 전탑과 전탑지는 모두 10기에 지나지 않고, 그중 7기의 전탑과 전탑지가 안동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전탑은 모두 4기인데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 등 3기가 안동에 모여 있다. 이 밖에 금계리 전탑, 옥산사 전탑지, 개목사 전탑지, 임하사 전탑지 등이 있어 안동 지역이 전탑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탑이 안동에 집중된 이유]
1. 불교의 한 종파가 안동에 전탑을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설
중국에서 유학했던 의상이 새로운 화엄사상에 근거한 사찰을 창건하고 유학에서 돌아온 신진 유학승과 이를 따르는 많은 승려들을 모아서 화엄종을 열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탑 형식을 함께 도입하여 집중적으로 탑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에 유행했던 전탑 축조 형식을 견문에 따라 세우고, 전탑 축조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함께 길렀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의상이 창건하여 중심 사찰로 썼던 부석사·봉정사 등에서는 전탑이 존재하지 않고 그 밖의 사찰에서도 전탑이 유행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의상이 확립한 화엄사상은 중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체적으로 정립되어 있어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던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봐도 불교 종파에 의해 전탑이 도입되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경주 불교의 조탑 형식과 구별되게 탑을 세웠다는 뚜렷한 근거도 없고 중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전탑이 특별히 사랑받았다는 확실한 사상적 배경 또한 희박하기 때문에 전탑과 불교 종파와의 특별한 관계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에서 비롯된 화엄종의 영향권 안에 있는 안동 지역에서, 또 통일신라시대라는 특수 상황에서 왜 집중적으로 전탑이 축조되었는지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2. 벽돌 이외의 탑 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설
안동의 지질을 살펴보면 두 개의 단층선이 지나고 있다. 하나는 NE-SW단층으로 백악기(1억 4000만~7만 년) 이전에 생긴 화강암 지대이고, 다른 하나는 백악기 이후에 생긴 단층이다. 두 시기에 대규모 변형 작용을 거치면서 암석에 많은 균열이 생겨 보통 화강암에 비해 파쇄 현상이 훨씬 심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따라서 화강암으로는 석조물을 조성하기 곤란하여 낙동강을 낀 퇴적암 지대에 있는 양질의 점토와 강모래를 이용한 벽돌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까운 일직면 조탑리(造塔里)와 풍천면 금계리(金溪里) 지역에 전탑과 전탑 재료, 흔적 또한 함께 남아 있어 그 근거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전탑이 대체로 강기슭[江岸]에 조성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강을 통한 벽돌의 수송이 쉬웠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벽돌을 구운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았고, 또 특별히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재료가 이곳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없는 상황이다.
3. 풍수비보설의 영향으로 강기슭에 전탑을 집중 조성했다는 설
안동에 현존하는 전탑은 모두 사찰이 폐사되고 없는 강기슭에 집중되어 있다. 『영가지(永嘉誌)』에도 수구비보(水口裨補) 또는 본부비보(本府裨補)로 언급되면서 전탑이 소개되고 있어,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 시기에 동일한 재료로 만든 전탑이 집중적으로 축조되었으리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도선(道詵)과 연결되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안동 지역 사찰의 창건 신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풍수사상에 따른 비보사찰과 탑의 축조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으며, 탑의 축조 시기 또한 같은 시기에 겹쳐 있어 이러한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강기슭에 집중되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른 전탑 축조라고 가정하더라도 꼭 벽돌이어야만 하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4. 전조문화권(塼造文化圈)과 교류하면서 초빙한 벽돌공을 비롯한 장인들의 기술을 도입하여 축조하였다는 설
신라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에 안동 지역 불교 세력이 중국과 빈번한 교류를 하였고, 특히 백제 지역의 훌륭한 장인들을 초빙하여 앞선 기술을 받아들여 전탑을 축조하였다는 설은 당시 시대 상황이나 여건으로 봐서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의상이 중앙 정치 세력이나 기득권을 가진 불교 세력의 지원 없이도 부석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을 창건할 수 있었던 것은, 안동 지역 토착 세력의 재정적 기반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착 호족들의 재정 동원 능력이나 통일신라 초기 삼국의 인적 교류 면에서 보면 중국의 전탑 유행과 함께 발달한 백제 유민들의 전탑 축조 기술의 도입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영농 기술의 발전과 전답의 관개 시설 등으로 농업에서 재정을 확보한 지방 세력, 신라 말기의 지방 분권 정책, 그리고 통일 초기의 국민 통합에 적절한 이념인 화엄사상을 필요로 한 통일 왕조의 은밀한 지원 등은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다소 무리한 추정에 근거하고 있고, 또 이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자료가 없는 가운데 세운 가설일 뿐이므로 전탑이 안동 지역에 집중된 근거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화엄종과 안동 지역 전탑의 관계]
1. 화엄종의 개창과 새로운 불교문화
안동에서 다른 지역과 달리 전탑이 일정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의 불교가 무언가 새로운 흐름 속에 있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그 흐름은 확실히 중앙인 경주로부터 확대된 것도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도 아니었다. 따라서 안동 지역의 전탑 조성을 통일신라 초기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쳤던 의상의 화엄종 개창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 의상의 활동이 수도인 경주보다 안동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정착하는 데 더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탑이라는 새로운 불탑 양식이 당시의 경주에서 시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경주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경주 지역의 보수성과 안동 지역의 유연성
통일이라는 역사적 변혁기에 경주의 기득권 불교는 대체로 보수적이었다고 여겨진다. 경주의 기득권 불교가 중국 불교의 새로운 흐름을 눈여겨보면서도 선뜻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수용이 곧 기득권 상실을 수반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변방 지역은 새로운 변화에 저항적인 세력이 비교적 약하므로, 당나라의 새로운 불교문화를 수용하는 데 훨씬 유연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의상이 당의 새로운 불교사상인 화엄종을 권력 중심지인 경주에서부터 이식하려 하지 않고 변방 지역인 안동에서 시작하려 했던 것도 이런 이유와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의상이 불교의 신사상인 화엄종을 안동에서 시도하여 성공한 배경에는 경주 불교의 보수성이 한 원인이 되었지만 지배 권력의 지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경주 불교는 통일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존의 불교를 고수하거나 현장(玄獎)의 새로운 유식사상에(원효와 의상의 입당 동기도 현장의 유식학 때문이다) 큰 관심을 보인 반면, 화엄종과 같은 신이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이었다.
3. 새로운 불교문화 이식 과정에서 세워진 전탑
기존 불교계의 이러한 태도는 통일 사회에 걸맞은 지배 체제 재편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최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저항 세력이기도 했다. 기존 불교계의 보수성을 재편하려는 신라 지배층은 통일 사회를 이끌 지도 이념으로서 신사상과 그것의 실천적 구현을 확대된 영역에 일원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은 불교계를 직접적으로 재편하는 데서 오는 저항을 피하기 위해 당시의 신사상이며 통일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기대 되는 의상의 화엄종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어느 정도 불교계의 재편을 이루고자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상이 영주 부석사를 근거지로 한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 화엄종을 개창하여 신사상의 교두보를 성공적으로 마련한 데에는 경주 불교의 보수성과 신라 지배층의 불교 개혁 의지가 상승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 통일 초기 안동 지역에 전탑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도 의상의 화엄종 개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통일 초기 당나라의 신문화가 도입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당의 신문화가 수도인 경주보다는 특정 지역인 안동에서 먼저 수용되고 실험된 것은 문화 전파 경로에 따라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된 배경에서 선택된 결과로 봄이 더 타당하다. 안동 지역의 전탑은 그때까지 발전해 왔던 신라 탑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종류]
현재 안동 지역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전탑은 무너져서 제 모습을 잃은 것까지 합치면 모두 4기이고, 전탑지까지 합치면 7기가 된다.
1.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제16호로 안동시 법흥동 8-1번지에 있다. 높이 17m에 이르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高)·최대의 전탑이다. 안동댐 하류의 강변, 중앙선 철도 바로 북쪽에 서 있는데, 법흥사 터로 추측되는 탑 북쪽 골짜기는 아주 좁은 편이다. 처음 문화재로 등록될 때 신세동으로 등록되어 정식 명칭이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이 되었다.
1) 구조
기단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완벽하게 탑신부를 보전하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장방형의 경우 6(두께)×14(단변)×28(장변)㎝이다. 제1층 옥신 남쪽 면에 감실이 있고, 기단 사방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한 19매의 면석(面石)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면석은 너비가 70㎝에서 88㎝로 균등하지 않고, 신장상도 광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섞여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장상의 전체 또는 일부는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옥개부의 모서리 부분은 정방형 벽돌을 사용하였고, 1층 옥개 하부에 화강암으로 만든 별석(別石) 세 개를 사용하는 등 전탑 붕괴를 막기 위해 상당한 배려를 한 것이 주목된다. 사역(寺域)과 탑의 기단부는 바로 남쪽의 철로 공사 때, 옛 법흥사의 중심부로 추측되는 대지는 조선시대에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할 때 거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낙수면의 윗면에는 즙와(葺瓦)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路盤)까지만 남아 있다. 이곳은 『영가지』의 기록에 따르면 법흥사 터로 추정된다.
2) 특징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과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의 감실이 형식적인 데 비하면 비교적 넓다. 감실 내부 벽의 높이는 약 2m이고, 천장은 사방의 벽에서 점차 벽돌을 내어 쌓았으며, 중심의 높이는 3m 가량 되어 내부에서 예불을 드리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불상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지만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3) 조성 시기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의 조성 시기는 기단부에 배열되어 있는 신장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신장상을 제외하면 탑에 대한 편년 자료는 거의 없다. 신장상의 전부 또는 일부는 원래부터 기단부에 있던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그중 일부가 탑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면 신장상 탑 부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8세기 중엽이 상한 연대로 여겨진다.
4) 위치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은 동남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을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강안형(江岸形) 전탑이다. 현재 전탑이 있는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10m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서쪽과 동북쪽으로는 산비탈이어서 사찰이 들어서기 어려운 환경이다. 사찰 건립이 가능한 곳은 서북쪽과 동북쪽 사이 고성이씨(固城李氏) 종가가 있는 곳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위치에서 살펴볼 때 전탑은 사찰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현재 사찰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법흥사에 대하여 노래한 박효수의 시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있다.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다.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법흥사는 산 중턱에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낙동강이 탑에서 상당히 아래쪽에 있고, 길도 강물을 따라 아래쪽에 있었다고 보면 현재 탑이 있는 곳도 길에서 볼 때 산중턱이라고 할 수 있다.
2.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보물 제56호로 안동시 운흥동 23번지 안동역 구내에 있다. 전탑에서 약 10m 서쪽에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다. 남쪽으로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강안형 전탑으로, 완전 해체 뒤 복원되었다고 한다.
1) 구조
1층 옥신 남면에는 감실, 2층 옥신 남면에는 1매석의 인왕상을 조각하여 감입하였고, 2층의 동·서·북면에도 별석(別石)을 사용하지 않은 작은 감실이 있는데, 신세동 전탑보다는 각 층의 체감률(遞減率)이 심한 편이다.
1층 옥신 남면의 감실 아래쪽에는 안상(眼象)을 잘 다듬어 꾸민 대석(臺石)이 있으나 처음부터 이 탑에 사용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이로 미루어 보아 탑의 하부까지 옛 모습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옥개 상부에 즙와(葺瓦)되어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 따르면 동부동 오층전탑이 있는 곳은 법림사(法林寺) 터로 추정된다.
2) 조성 시기
동부동 오층전탑은 신세동 칠층전탑보다는 조성 시기를 고찰하기 위한 자료 사정이 나은 편이다. 탑 오른쪽에 있는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는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중부와 하부에 간공(杆孔)이 있고, 상부에는 세로 40㎝에 이르는 대형 간구(杆溝)가 있다.
상부에 대형 간구가 있는 당간지주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두 개의 당간지주 구조가 비슷하므로 운흥동 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를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만들어진 826년, 즉 9세기 초로 하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며, 이것은 동부동 오층전탑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다만 탑의 감실 입구에 탑과 무관하게 보이는 안상문 대석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처음 조성 당시의 모습은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2층 남면의 인왕상도 처음 탑을 세울 당시에 감입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므로 탑의 조성 시기는 하한 연대를 9세기 초에 두고 상한 연대를 증명할 만한 새로운 자료의 출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3.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
보물 제57호로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139번지 넓은 골짜기 중앙에 있다. 높이 약 8.65m로 현존 한국 전탑 중에서 중간 크기에 속한다. 탑에서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송양천이 흐르고 있어 강안형 전탑으로 분류된다. 현재 탑을 포함한 옛 사역은 과수원으로 경작되어 심하게 황폐해진 상태이다.
1) 구조
사용한 벽돌은 27.5(1변)×5.2(두께)㎝의 정방형과 26.7(장변)×14.2(단변)×4.9(두께)㎝의 장방형 두 종류이다.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의 또 다른 특징은 벽돌에 새겨진 당초무늬를 들 수 있다. 이 무늬는 목범(木范)에 의하여 시문된 것으로 육안 관찰이 가능한 범위에서 세 종류까지 확인할 수 있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어 있는 사진을 보면 1층 옥개부에서 상부까지 부분적으로 벽돌이 빠진 것 외에는 수리된 현재의 모습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탑의 무게를 감당하는 1층 옥신이 견고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현재 탑은 석축 기단 위에 있는데, 몇 십 년 전만 해도 탑은 완만한 언덕 위에 있었다고 하므로 본래는 기단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 주변에는 석탑의 옥개석 등이 남아 있어 다른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영가지』에도 ‘일직삼탑(一直三塔)’이라 하여 전탑 외에 두 개의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특징
가장 큰 특징은 1층 옥신 전체를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축대를 쌓듯이 반듯하게 쌓아 올린 점이다. 1층 감실 좌우에는 약 10㎝의 고부조(高浮彫)로 표현한 인왕상이 배치되어 있고, 감실 내부에는 23×24.5㎝의 각목심주(角木心柱)가 있어서 이 탑을 포함한 다른 전탑 및 모전석탑의 축조 방식을 유추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3) 조성 시기
탑에 새겨진 당초무늬와 이곳에서 출토된 암막새의 무늬로 보아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감실 양옆의 인왕상이 양각된 높이가 10㎝ 정도의 고부조인 점, 신체가 4등신에 가까운 점 등으로도 8세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4. 안동 금계동 다층전탑
안동시 풍천면 금계리 575번지에 있다. 1959년까지 어느 정도 파괴는 되었어도 4층까지 형태를 유지하였으나 가을에 태풍 사라가 내습하면서 거의 무너져 버렸다. 현재의 모습은 무너진 지 몇 개월 뒤에 마을 사람들이 주변의 벽돌을 모아 단층으로 복원한 것이다. 탑 남쪽에는 하신천이 흐르고 있어 강안형 전탑으로 분류된다. 바로 북쪽에는 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1층 옥신 동면의 극히 일부만 무너지기 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용한 벽돌의 너비는 4.6~5.3㎝로 일정하지 않으며, 특이한 점은 벽돌 아랫면에 옛 기와처럼 삼베무늬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다른 전탑과 제작 기법이 다름을 의미한다. 붕괴 전의 사진을 보면 4층인데 원래는 5m를 넘지 않는 5층의 소형 전탑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수막새로 미루어 하한 연대는 9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5. 임하사 전탑지
안동시 옥동 1225번지[하이마로 385]에 있다. 기록에는 나와 있으나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가 건설 공사 과정에 절터가 드러나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긴급 발굴됨으로써 전모가 밝혀졌다. 옥동의 낙동강 북쪽 기슭에 있던 강안형 전탑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6월 발견 당시에는 지대석의 일부와 함께 주변에 탑을 쌓을 때 사용한 벽돌들만 흩어져 있었다.
같은 해 11월 발굴한 결과 매우 특이한 목탑식 지하 구조를 갖고 있으며, 특별한 시단 시설 없이 1층의 옥신이 바로 쌓여 있는 특이한 전탑이었음이 밝혀졌다.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탑지의 한 변이 5.6m에 이르는 거대한 전탑으로 탑 기단부 중심의 지하 1.5m에서 석재 사리함이 나와 사리장엄구를 수습하였고, 안동 지역에서는 드물게 연꽃무늬와 당초무늬가 새겨진 벽돌을 사용하였다.
벽돌의 연꽃무늬는 반원 또는 4분의 1 원으로 2매나 4매의 벽돌이 겹쳐질 때 완전한 원문(圓文)이 되도록 새겨져 있다. 벽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당초무늬로 보아 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당초무늬는 유려함에서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영가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하사 전탑은 본래 7층으로 1487년(성종 18) 새로 고친 뒤로 1576년(선조 9) 양희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원래 모습을 유지하였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안동의 선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하림사(下臨寺)를 들고 있는데, 곧 임하사이다. 즉 『경상도속찬지리지』가 편찬되던 1469년(예종 1) 당시 임하사는 안동의 대표적 사찰로서 전탑의 모습도 웅장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사역은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의 추정 사역보다 넓어 보인다.
6. 옥산사 전탑지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 서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옥산(玉山) 중턱에 있다.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벌판과 멀리 첩첩이 겹쳐진 산들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지형 전탑이다. 옥산사는 『영가지』에 따르면 오래된 사찰로 금당 서쪽에 암혈(巖穴), 청정(淸井), 마애불(磨崖佛, 옥산사 마애약사여래좌상), 전탑 등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사관(寺觀)과 일치한다. 또 옥산사 전탑은 『영가지』에 나오는 월천전탑(月川塼塔)으로 추정된다.
전탑지는 옥산사 마애약사여래좌상에서 동남쪽으로 약 30m 떨어진 능선 끝자락에 있는데 1965년 실시한 조사 과정에서 기단의 크기가 1변이 252㎝ 정도의 정방형에 가까운 것임이 밝혀졌다. 현재 높이 50㎝의 기단면석과 벽돌 파편 10여 점만이 남아 있다.
완전한 장방형 벽돌의 크기는 5.8(두께)×13.3(단변)×28(장변)㎝이고, 모래가 많이 섞인 회청색 또는 회백색의 무문전이다. 기단면석의 바깥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모각(模刻)되어 있다. 옥산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은 규모는 작지만 안동 지역 유일의 삼존불로 주목된다.
7. 개목사 전탑지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天燈山) 개목사에 있다. 절에서 서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작은 능선의 높은 지대에 있는 산지형 전탑으로, 아래로 좁은 들판이 내려다보이고 그 건너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지금 전탑지에는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작은 단을 만들어 놓아 전탑지임을 알 수 있으나, 이것마저 없으면 이곳이 과연 전탑지인지 의심할 만큼 철저히 파괴된 상태이다. 1965년 조사에서 적심석(積心石)만 확인되었고, 기단 1변이 약 2m의 소규모 전탑임이 밝혀졌다. 지표에 보이는 몇 개의 벽돌 파편의 두께는 4.6~5.5㎝이다.
개목사의 창건은 의상(義湘)과 그의 제자인 능인(能仁)과 연관되어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0) 때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절 뒤에 있는 천등굴에서 도를 닦던 중 천녀(天女)의 이적(異蹟)으로 도를 깨치고 여기에 큰 절을 세워 흥국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의상이 천등산 정상에서 수도할 때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추었으므로 하늘의 등으로 도를 깨쳤다고 하여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고 하고 절 이름을 천등사라 하였다는 설이 전해 온다.
[의의와 평가]
안동의 전탑은 경주 지역의 전탑과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잠시 동안 유행하였다가 사라졌다. 화엄종파에서 전탑을 선호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화엄교단의 위세로 보아 충분히 전국으로 유행시킬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전탑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1. 보존력이 약하다
보존력이 너무 약하여 대부분의 전탑이 그 원형을 잃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대표적인 예로 금계동 다층전탑으로, 1층에서 4층까지 전해 왔으나 1959년 태풍 사라에 무너지고 자취만 남아 있다.
2.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
축조 과정에서 많은 경제력과 인력이 요구된다. 전탑은 그 축조 과정이 독특한 만큼 상당한 공력이 들어간다. 벽돌을 만드는 데도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고 번거로운 공정이 따르기도 한다. 흙을 혼련(混鍊)해서 성형하고, 시문구(施文具)로 무늬를 새겨 넣고, 처음은 음지에서 다음은 양지에서 충분히 건조하여 물기를 완전히 뺀 후라야 가마에 넣을 수 있다. 가마 온도는 섭씨 1,000도 내외의 고온을 유지해야 제대로 된 벽돌이 만들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탑을 쌓기 위해서는 벽돌을 만들었던 가마터에서 탑을 세울 곳으로 벽돌을 옮겨야 하고, 작은 벽돌을 하나하나씩 쌓기 위해서는 석탑이나 목탑에 비하여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이처럼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전탑을 건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3. 전탑보다 석탑이 만들기 쉽다
한국은 화강암이 풍부하여 벽돌보다 석재가 탑의 재료로 훨씬 알맞았다. 석탑은 재료를 구하기 쉽고 건립 과정이 용이하며 보존성이 전탑보다 훨씬 더 좋은 반면, 전탑의 재료인 벽돌에 대한 친근감이나 사용 경험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석탑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화엄교단을 중심으로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에서 제작이 시도되었던 전탑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경주 지역의 전탑과 마찬가지로 우리 것으로 깊이 뿌리내려 전국적으로 유행하지 못하고 안동 지역에서 잠시 동안 유행하다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