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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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在地士族 |
영어의미역 | Aristocrats Who Own Field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명자(역사) |
[정의]
조선시대 안동 지역 향촌사회의 지배 계층.
[개설]
재지사족은 대체로 고려의 향리 가문 후예로 고려 말 조선 초에 첨설직(添設職)·동정직(同正職)·군공(軍功)·과거 등을 통하여 이족(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신분이 상승하였거나, 고려 후기 이래 상경종사(上京從士)하였다가 왕조 교체를 포함한 정치적 격변기에 본향(本鄕)·처향(妻鄕)·외향(外鄕)을 따라 낙향하여 재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계층이었다.
재지사족은 대체로 향촌 사회에서 중소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과 사족으로서의 신분적 배경을 가진다. 이들은 점차 향리로부터 향촌 사회 운영권을 장악하여 16세기 중후반부터 그들 중심의 지배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유향소(留鄕所)가 조직되고 향안(鄕案)·향규(鄕規)가 작성되었으며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동약·동계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변천]
재지사족은 대체로 16~17세기 향안에 오를 수 있는 존재들로 스스로를 청문(淸門)·문벌(門閥)·세족(世族) 등으로 표현하였으며, 유향소를 운영하고 향교와 서원을 출입하며 향약 또는 동계·동약의 실시를 주도하던 계층이었다. 그러나 재지사족의 성장 시기, 존재 형태, 구체적인 성격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재지사족의 존재와 위치는 18세기부터 크게 동요되었다. 그것은 16~17세기 재지사족으로서의 위치와 존재를 규정해 주던 향안이 여러 사정으로 더 이상 작성되지 못하였고, 다양한 지배 기구와 조직 또한 재지사족에 의해 획일적으로 장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토대로 새로운 세력, 즉 신향(新鄕)과 향품(鄕品)의 성장이 더욱 활발하였고, 이들은 관권(官權) 또는 노론 집권 세력과 결탁하여 재지사족의 향촌 지배에 참여함으로써 유향(儒鄕)과 신구향(新舊鄕)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거나 향전(鄕戰)을 유발하였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향전은 결국 향론(鄕論) 분열과 함께 사족의 향권(鄕權)을 크게 제약하거나 상실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18~19세기 재지사족의 존재와 성격을 모호하게 하였다.
사족의 향론 분열은 사족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18~19세기 재지사족은 경제적으로도 분화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적으로 농업 생산력의 발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등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7세기 이후의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상속제 관행에 따른 현상이었다.
16~17세기에 있어서도 사족 상호 간의 경제적 불균형이 있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족 내부에서 조정되고 있었고 또 한시적인 것이었다. 즉 자녀 균분 상속을 통해 다음 세대에서는 자녀의 수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의 대지주와 몰락 양반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것이었고, 또한 시간의 경과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활동]
고려 초기 이래 지방 관부의 소재지인 동시에 토성 이민(土姓吏民: 본관 성씨를 가지고 대대로 토착하여 살면서 일정한 지배 신분의 속성을 가진 유력자 집단)이 모여 살던 읍치(邑治) 지역은 15세기 이전에 이미 개발된 데 비하여 향촌 지역은 15세기 이후에 적극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민가가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하던 향촌 지역이 적극 개발되어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 이래 재지사족이 이족의 신분에서 분화하면서부터였다. 이 과정에서 재지사족은 거주하고 있던 읍치 지역에서 멀리 벗어나 임내 지역이나 인근 다른 읍의 외곽지대로 복거(卜居)하거나 이주하여 향촌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재지사족이 향촌 지역을 적극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지방의 유력 계층으로 더욱 용이하게 입안(立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개간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수전(水田)과 이앙(移秧)을 전제로 한 새로운 농법을 적극적으로 수용·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산간 계곡에 촌락이 크게 발달하였고, 18세기 이후 명문 사족의 거주지인 동성 촌락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재지사족의 앞선 농업 기술은 주위의 일반 농민층에게도 보급되었을 터이고, 일반 농민에 의한 향촌 개발 또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16세기 후반 이후에 작성되는 여러 읍지(邑誌)의 각 리조(里條)에 사족의 거주 지역뿐만 아니라 소민(小民)의 거주 촌락도 집촌(集村)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임진왜란 후의 토지 개간과 복구가 농민의 주도로 전개될 수 있었다.
재지사족의 복거나 이주를 통하여 적극 개발되기 시작한 향촌 지역은 이제 농민만이 거주하는 지역이 아니라 재지사족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읍치 지역을 지배하고, 나아가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조선 사회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촌락은 사족의 거주 유무에 따라 촌락 사회의 구조와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촌락의 유형 또한 단순히 주민의 생업과 거주 형태에 따른 구분보다는 사족의 존재 유무와 거주 성씨에 따른 구분이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16세기 후반 또는 17세기 개인이 편찬한 읍지의 각 리조에는 사족의 거주 유무와 시거(始居) 또는 복거를 구체적으로 기재하고 있다. 즉 촌락은 사족의 거주 지역인 반촌(班村)과 평민·천민의 거주 지역인 민촌(民村)으로 분화되었고, 분화의 형태는 사족의 세력이 강한 지역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역할]
향촌 지배란 재지사족이 다양한 향촌 지배 조직을 통하여 향촌 단위에서 하층민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지배하고, 수령과 향리를 견제하고 통제함으로써 그들의 신분적·경제적 특권을 유지·강화하고자 함을 뜻한다. 향촌 지배는 자치적으로 또는 수령의 읍정(邑政)에 참여함으로써 수행되고 있었지만, 양자의 관계는 사실상 중첩적으로 모호한 것이었다.
유향소·향규·향안·동계·동약 등의 조직과 규약의 마련이 자치적인 영역이라면, 사실상 민에 대한 형벌권이기도 한 교화(敎化)와 표리 관계에 있던 부세 운영에 대한 참여는 수령권과 타협을 통하여 수령의 읍정이 위임된 것이거나 그 일부로서 행해지던 것이었다. 즉 향촌 지배는 사족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이라는 차원에서 추구되고 있었다.
재지사족은 공동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국가 또는 농민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고자 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 또는 수령권의 견제와 농민의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촌 지배의 또 다른 목적은 바로 수령과 농민의 견제와 저항에 대하여 공동체적인 대응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다양한 향회를 통한 향론, 곧 사족의 공론(公論)으로 구체화되었다. 결국 향론의 집약은 재지사족 향촌 지배의 구체적인 표현이었고, 민의 저항과 수령 또는 국가 권력의 견제에 맞서 향촌 지배를 가능하게 하였다.
재지사족으로서 향촌 사회에서 갖는 특권은 사족이라는 신분과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 그리고 국가 차원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확보되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국가적 입장과 사족들의 이해가 항상 일치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재지사족은 그들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확보·유지하기 위한 장치를 필요로 하였다. 유향소·향안·향규·향약 등 군현 단위의 조직과 동약·동계 등 촌락 단위의 향촌 지배 조직은 이러한 사정에서 마련되었다.
[지배와 해체]
재지사족의 향촌 지배 범위는 시기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16~17세기가 군현과 촌락 단위의 조직이 종횡으로 연결되고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함으로써 향촌 지배가 가능한 시기였다면, 18~19세기에는 군현 단위의 상부 구조가 해체되거나 분열됨으로써 향론은 더 이상 집약될 수 없었다. 따라서 사족의 지배가 실제로 관철될 수 있었던 곳은 그들의 거주 촌락인 반촌이었다.
재지사족이 거주하는 곳은 특정 촌락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17세기 이후에는 특정 성씨의 동성 촌락으로 발달해 가고 있었다. 즉 재지사족의 촌락 지배는 동성 촌락에서 더욱 확실한 것으로 보였고, 이것은 군현 단위의 전 촌락적인 범위가 아니라 사족에 의해 지배가 관철되고 있던 개별 촌락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개별 촌락에 있어서도 촌락 사회 내부의 다양한 갈등 때문에 사족의 지배가 일방적으로 관철될 수는 없었다. 경제적인 계층 분화, 적서 간의 문제, 농민의 성장이 갈등의 원인이었다면, 동계·동약의 계속적인 실시가 불가능하였고, 사족 중심으로 짜여 있던 촌락이 분동되고 있던 사정은 구체적인 결과였다. 또한 이 시기 동성 촌락의 여러 조직과 규약에서 동성 간의 의리와 돈목(敦睦)이 특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역으로 보여 준다.
이 현상은 결국 재지사족의 촌락 지배가 점차 해체되어 감을 뜻한다. 즉 좁게는 신분적·경제적 기반 위에서 다양한 향촌 조직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직접 지배함으로써 특권을 유지·강화하고자 하였던 사족 지배 조직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재지사족 지배 조직의 해체는 그 자체로서만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족의 향촌 지배, 나아가서는 조선 봉건 사회의 해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남 지역의 재지사족]
영남 지역의 재지사족 가문은 각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고, 근처의 토지 등을 장악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닦았다. 특히 중앙 관직에 진출한 가문들은 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컸다.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사족 가문으로는 선산김씨(善山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파(安東派), 안동권씨(安東權氏) 안동파(安東派), 진보(성)이씨 안동파[眞寶(城)李氏 安東派],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파(安東派), 풍산류씨(豊山柳氏) 하회파(河回派),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 진주하씨(晋州河氏) 안동파(安東派), 영천이씨(永川李氏) 예안파(禮安派), 봉화금씨(奉化琴氏) 예안파(禮安派), 재령이씨(載寧李氏) 영해파(寧海派), 청주정씨(淸州鄭氏) 영남파(嶺南派), 전주류씨(全州柳氏) 안동파(安東派), 예천권씨(醴泉權氏), 풍양조씨(豊壤趙氏) 상주파(尙州派), 창녕조씨(昌寧曺氏), 서산정씨(瑞山鄭氏) 야로파(冶爐派), 고창오씨(高敞吳氏) 영남파(嶺南派), 고령박씨(高靈朴氏) 도진파(桃津派), 광주이씨(廣州李氏) 칠곡파(漆谷派), 양동손씨(良洞孫氏), 양동이씨(良洞李氏)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