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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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진영 |
[정의]
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조선시대 안동 지역은 읍으로서의 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경상도의 중심 지역으로 존재하였다. 세조 때는 잠시 진(鎭)이 설치되어 부사가 병마절도부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당시 안동 지역의 토지는 척박했으나, 풍속은 농상에 힘쓰고 예양과 절검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연혁]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안동부의 호구수는 847호 6,859인, 예안현은 174호 1,445인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고려 후기 이래 정치적·학문적으로 중시되었고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다. 또 선비들의 동족마을이 많이 있어서 여러 성씨들의 명문(名門)이 대를 이어 살아 천년(千年)의 명촌(名村)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였다.
1576년(선조 9) 안동부 관내에 패륜아가 그 어머니를 죽인 변이 있어 안동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81년(선조 14) 고장 사람들의 상소로 다시 안동부로 회복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또한 김해(金垓)와 류종개(柳宗介) 등이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776년(영조 52) 도현(道縣)의 역변(逆變)으로 다시 안동현으로 격하되었고, 1785년(정조 9) 다시 안동부로 회복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8도를 폐하고 전국을 23관찰부로 고치면서 안동에 관찰부를 두고 경상도 동북부 17개 군을 관할토록 하였다. 다음해인 1896년 8월 4일 23관찰부를 폐하고 13도로 개편하여 안동관찰부는 만 1년 1개월 만에 폐지되었는데, 이때 안동군과 예안군이 분리되었다. 또한 감천면은 예천군에, 내성면·춘양면·소천면·재산면은 봉화군에 각각 편입되어 읍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향촌사회]
조선시대 향촌사회는 재지사족이, 그들이 가지는 사족으로서의 신분과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통해,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지배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치적으로, 또는 수령의 읍정(邑政)에 참여함으로써 수행되었지만, 양자의 관계는 사실상 중첩되어 모호한 형태를 보였다.
유향소·향규·향안·동계·동약 등의 조직과 규약 등이 자치적인 영역이라면, 사실상 민에 대한 형벌권이기도 한 교화(敎化)와 이와 표리관계에 있던 부세 운영에의 참여는 수령권과의 타협을 통해 수령의 읍정이 위임된 것이거나 그 일부로서 행해지던 것이었다. 이 같은 향촌 지배는 물론 사족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이라는 차원에서 추구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사족 가문으로는 안동김씨, 안동권씨, 의성김씨, 풍산류씨, 전주류씨 등이 있었다. 이들 가문은 각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고, 근동의 토지 등을 장악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닦았는데, 중앙 관직에까지 진출한 가문들의 경우 지역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컸다.
[학문과 사상]
조선 중기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8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황은 기본적으로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의 관점에서 이기론을 해석했다. 이기불상잡이란, 이(理)는 하늘의 이치이고 기(氣)는 그것의 구현 재료이므로 이 둘은 서로 섞일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즉 논리적 사유의 입장에서 형이상적인 이(理)는 형이하학적인 기(氣)와 서로 같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이이고 기는 기이기 때문에 서로 섞일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서 그 발현의 결과가 항상 좋으므로 이에서 나오고, 칠정은 그 발현의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므로 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단순히 사단은 이가 발해서 생기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호남의 기대승은 영남에 사는 이황의 이런 관점에 대해 반박했다. 기대승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원리를 기본으로 이황의 주장을 반박했는데, 이황의 관점에서 사단과 칠정을 바라본다면 이는 성리학의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성리학에서는 이와 기를 각각 그렇게 있도록 만드는 것과 그렇게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변하지 않는 하늘의 이치이고 기는 모든 변화의 근원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대승은 변하지 못하는 이가 움직여서 사단이라는 감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더불어 기대승은 마음의 이치는 사물의 이치와 같다는 성리학의 기본 입장을 언급하며, 사물의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작용하는데, 사람의 마음에서는 그 둘이 분리되어 작용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며 이황의 논리를 반박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사단과 칠정은 분리되는 감정이 아니며, 칠정 중의 선한 부분이 사단을 가리키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이황은 8년간의 긴 논쟁 끝에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 사단은 이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서 생기는 것이며, 칠정은 기가 움직이면 이가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다. 즉 사단이란 이가 움직여서 기가 따라오는 것이고, 칠정이란 기가 움직여서 이가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다. 비록 이렇게 주장을 수정하였지만, 여전히 이황은 사단은 선으로 귀결되고 칠정은 선·악으로 모두 귀결이 가능하기에 그것의 출발점을 살펴보면 서로가 다르다는 입장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사단이라는 도덕적 원리가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칠정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 도덕적 원리의 절대성을 확립하여 주체적 인간의 확립과 사회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한편 기대승은 성리학의 도덕적 측면보다는 관념적인 측면에서 용어의 불분명한 사용과 모호한 표현으로 인한 성리학 체계의 모순점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논쟁은 학계에 청신한 공기를 주입시켜 주자학을 심성설 연구에 몰두케 함으로써 우리의 유학 철학을 중국의 그것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영남학파·기호학파, 또는 주리파·주기파라는 유학계의 양대 산맥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이 안동 출신의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중앙 정계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노력하였다면, 김해와 류종개 등은 의병장으로서 안동 지역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안동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이 조직된 것은 경상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것은 이들 지역이 왜적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과 가산을 보전할 수 있어서 의병을 일으켜 도리어 왜적의 화를 자초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들 지역의 사족들에게 적극적으로 토적의 대열에 나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과 안집사 김늑(金玏)의 활동 때문이었다.
이후 예안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병의 창의와 봉기기가 본격화되어서, 7월 18일경에는 예안에서 김해가, 안동에서 배용길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의병을 조직하는 문제는 용이하지 않았고, 더구나 각 지역마다 의병이 조직되었다 하더라도 세력이 약하면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 간의 연대가 절실하였기에 소수의 의병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위한 지역 간 연대 논의가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었다.
7월 15일 의성 출신 우경충(禹景忠)과 의흥(義興) 출신 박연(朴淵)이 안동과 주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의병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7월 20일에 마침내 안동을 위시하여 예안·의성·의홍·군위 등지의 사림이 일직에 모여 동맹하고, 승문원정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정백(李庭栢)과 배용길을 좌우부장으로 삼아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는 연합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안동을 본진으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안동 향병의 조직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북부 지역에서 창기한 대부분의 의병을 망라하는 의병 연합체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체적 조직을 이용하여 합동 작전을 수행하거나, 또는 다른 지역 의병과 활발한 공동 작전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직이 하나로 뭉치기는 했으나 그 활동은 다른 지역 의병부대와 마찬가지로 매복이나 야습, 또는 소규모의 적에 대한 게릴라적인 전투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안동 향병이 경상도 북부 지역 연합체로 조직되었지만 활동은 독자적으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 향병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 지역의 각지에서 활동하였고, 관군과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명군의 남하와 왜군의 퇴각과 더불어 활동 근거지를 밀양·진주 그리고 경주 등지로 옮기고 있었다. 이 시기의 상세한 활동 내용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안동 향병장이 경상좌도 의병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