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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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柳氏 |
영어의미역 | Jeonju Ryu Clan |
이칭/별칭 | 무실류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안동시 임동면 마령리|안동시 삼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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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
입향시기/연도 | 16세기 중엽 |
성씨시조 | 류습(柳濕) |
입향시조 | 류성(柳城, 1533~1560) |
[정의]
류습을 시조로 하고 류성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 지역의 전주류씨는 무실류씨로도 불리며 전주류씨의 시조 류습(柳濕)의 8세손 류성(柳城, 1533~1560)이 1550년경 안동 무실(현 임동면 수곡리)에 정착하고 후손들이 크게 문호를 넓혀 세거해 온 가문이다.
[연원]
류습이 고려 말에 전주에 살면서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류습을 시조로 하고 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류습의 둘째 아들 류극서(柳克恕)는 직제학에 오르고 류극서의 둘째 아들 류빈(柳濱)은 영흥부사를 지냈다. 류빈의 둘째 아들 류의손(柳義孫)은 세종 때 예조참판에 올랐다. 류의손의 증손 류윤선(柳潤善)은 1500년 생으로 한성에 세거하였는데 영주에 살던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영주로 이거하였다.
[입향경위]
류윤선의 아들 류성이 안동 내앞(현 예안면 천전리)에 살던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어 처가의 농장이 있는 무실에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수곡에 정착한 류성은 25세에 요절하였으며 두 아들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는데 맏아들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1617)는 곽재우(郭再祐) 의병과 함께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아들 류복립(柳復立)은 외숙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안동 지방에 살고 있는 전주류씨는 모두 류복기의 후손들이다. 류복기는 류우잠(柳友潛), 류득잠(柳得潛), 류지잠(柳知潛), 류수잠(柳守潛), 류의잠(柳宜潛), 류희잠(柳希潛) 등 6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이 임동면 수곡리(무실)을 근거지로 임동면 박곡리·마령리·고천리, 삼산동 등지에 취락을 이루고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이어져서 문과 출신 10여 명, 생원 진사 30여 명, 문집 출간 100여 명에 퇴계학통을 계승한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의 대가가 배출되고 행실과 문학으로 이름 있는 선비가 끊이지 않아 이 지역의 손꼽히는 명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주목사를 지낸 류정휘(柳挺輝), 밀양부사를 지낸 괴애(乖厓) 류지(柳榰), 청백리에 오른 함벽당(涵碧堂) 류경시(柳敬時), 공조참의에 오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형조참의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대사헌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1702~1761) 등은 밝은 치적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백졸암(百拙庵) 류직(柳稷, 1602~1662),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대야(大埜) 류건휴(柳健休), 노애(蘆厓) 류도원(柳道原),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1773~1827), 수정재(守靜齋) 류정문(柳鼎文) 등은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또 『상변통고(常變通攷)』 22권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과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은 영남 유학의 거봉으로 퇴계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류시연(柳時淵), 개화기 선구자로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신교육과 사회 개혁에 매진하면서 자주적 민족사관으로 저술한 새로운 역사책 『대동사(大東史)』 10권을 남긴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의거의 주역이었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구국 활동에 생애를 바친 단주(旦洲) 류림(柳林)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다.
[현황]
400여 년을 이어오던 전주류씨의 세거지 수곡, 박곡, 한들, 마령 등은 임하댐 건설로 모두 수몰되어 종가를 비롯한 일부는 옛 수곡마을 뒷산에 이주단지를 만들어 옮겨갔고, 다른 일부는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새 기지를 마련하여 집단적으로 이거하였다.
[관련유적]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서당(岐陽書堂)과 무실 종택, 류성의 처 의성김씨 정려문, 정재 종택(定齋宗宅), 만우정(晩愚亭)은 임동면 수곡리에 있고, 예안면 주진리에 삼산 종택(三山宗宅)과 삼산정(三山亭)이 있다. 류성의 현손인 류익휘(柳益輝)가 지은 만령초당(萬嶺草堂), 류승현과 류관현 형제가 수학하던 삼가정, 용와 종택과 침간정(枕澗亭), 류장원이 강학하던 동암정(東巖亭), 류건휴가 강학하던 대야정(大埜亭), 류휘문의 고택, 류정문의 고택, 근암(近庵) 류치덕(柳致德)의 고택, 류승현의 현손 류치검의 고택 등은 해평 일선리로 이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