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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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西農莊 |
영어음역 | Baekseonongjang |
영어의미역 | Baekseonongjang Garris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항일운동단체|독립운동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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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15년 |
해체연도/일시 | 1919년 |
설립자 | 부민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 출신의 인사들이 중국 길림성 통화현에서 만든 군영.
[개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국과 일본의 전쟁 발발을 예상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대책을 세우면서 군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원병상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백서농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닫지 않은 밀림지대로서 곰·멧돼지·오소리 등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깊은 산골짜기였다. 이곳에 막사를 짓고 큰 뜻을 품은 동지들이 모여들어 새와 짐승을 벗 삼아 스스로 밭을 갈고 나무하는 농사꾼이 되어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굳은 맹세를 방불케 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즉 백서농장의 군인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설립목적]
1915년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이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만주 통화현 팔리초(八里哨) 소백차(小白岔)에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위한 기반을 갖추고자 군영인 백서농장을 건설하였다.
[변천]
1914년 가을부터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은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군영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은 만주 통화현 팔리초 소백차 지역 일대에서 벌목을 시작하여, 1915년 병영을 완성하였다. 초대 장주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김동삼이었고, 간부들은 주로 신흥학우단의 회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외적으로는 백서농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내부에서는 우리 군영(軍營)이라 불렀다.
이후 백서농장에는 신흥강습소 및 신흥중학교 1회부터 4회 졸업생 일부와 각 지교(枝校)·노동강습소 등에서 훈련된 군인 385명을 입영시켰다. 백서농장은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가 부족하여 많은 군인이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919년 3·1운동 후 한족회의 지시로 문을 닫았다. 백서농장에 배속된 이들은 곧 상해임시정부의 담당 아래에 있었던 서간도지구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확대 및 개편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서농장은 독립운동기지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열악한 산악지대에서의 생활은 독립전사들의 심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켰고, 백서농장에서의 4년간에 걸친 고난은 이후 항일 유격전에 큰 교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송 김동삼을 비롯한 안동 출신 인사들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