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008
한자 安東車戰-
영어음역 Andong Chajeonnori
영어의미역 Chariot Game of the Andong Area
이칭/별칭 동채싸움,동태싸움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집필자 한양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69년 1월 7일연표보기 - 안동차전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안동차전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재지정
성격 남성 대동놀이
노는 시기 정월 대보름
관련의례행사 없음
관련단체 안동차전놀이보존회
예능보유자 이재춘
문화재 지정번호 국가무형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던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

[개설]

안동차전놀이는 동서로 편을 갈라 수백 명의 장정이 서로 ‘동채’를 밀어 붙여 상대방을 땅에 닿게 하여 승패를 겨루는 놀이이다. 동채싸움, 동태싸움 등이라고도 한다. 동채싸움이라는 이름은 나무로 만든 놀이기구가 동채(동태)인 데서 연유한다. 안동읍(현 안동시내)뿐만 아니라 임하면 금소리(금소동채싸움)와 북후면 옹천리 등에서도 행해졌다.

[연원]

차전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먼저 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견훤과 결전을 벌이게 되었을 때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 세 장군의 도움을 얻어 승리할 수 있었다. 뒷날 이 세 분을 삼태사(三太師)라 하고 이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차전놀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원래 지렁이였던 후백제의 왕 견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안동으로 오자 그를 몰아내기 위하여 소금 배를 풀어 낙동강 물을 짜게 만드는 한편, 읍민들이 모두 나서서 팔짱을 끼고 어깨로 강물에 밀어 넣어 죽게 하였다. 그 뒤로 안동 사람들은 지렁이를 떠밀어 낼 때처럼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어깨로 밀어내는 차전놀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군민들이 견훤군을 무찌를 때에 방어진으로 설치한 채(寨)를 뽑아 여러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를 앞세워 진격하였다. 견훤군은 여기에 밀려 ‘개치기골’(개축들, 안동시 옥동)로 쫓겨 패하였다.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의 군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서부로 나뉘어 나무묶음을 메고 겨루기를 하였다고 한다.

[놀이 방법]

차전놀이는 본동채싸움과 째기동채싸움으로 구분된다. 먼저 본동채싸움은 안동읍에서 행해졌던 초대형의 차전으로서 읍내의 거주민뿐만 아니라 안동부(安東府)에 속하는 각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동채의 구조상 공중에서 상대편 동채와 맞닥뜨려서 함께 공중으로 솟구치거나 회전하는 등의 접전을 펼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싸움의 양상도 동채 앞에 포진하고 있던 머리꾼들이 격돌하여 상대 진영을 돌파하여 상대편을 밑으로 끌어 내린 뒤에 부수어버리거나 동채끼리 근접하였을 때 상대편의 동채를 밑에 깔고 내리눌러서 땅에 떨어뜨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째기동채싸움은 약식동채를 이용한 차전으로서 금소·옹천 등지에서도 행해졌다. 발의에서 싸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발의

추수가 끝나면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서 차전놀이의 거행 여부를 의논한다. 거행하기로 결정하면 곧 상대편에 통고한다. 통고를 받으면 대부분의 경우 즉시 회답하고 각기 준비에 들어간다. 먼저 도감(都監)과 대장을 뽑는데, 이들은 대개 차전놀이의 경험이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추대된다.

연말과 정초가 되면 각 편에 속하는 면과 동에서 대표자들이 도감댁(都監宅)을 찾아가 차전놀이의 준비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기 위해 성의껏 모아온 금품을 내놓는다. 이어서 차전놀이 당일의 집합장소와 인원동원 및 작전 등을 숙의한 뒤 돌아간다. 이후에도 수시로 연락을 취하여 준비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한다.

2. 체목(体木)의 선정과 운반

동채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것이다. 체목으로 쓸 곧고 굵기가 고른 참나무를 구하려고 청송·봉화, 때로는 강원도까지 사람을 파견하여 적재를 물색케 한다. 적재가 발견되면 소임을 보내 감정하고, 적당한 것으로 판정되면 나무에 금색을 쳐서 부정과 잡귀를 막는 한편 그 고을 현감에게 보고하여 보호를 청한다.

이듬해 봄 정월 초순에 목공(木工)은 목욕재계한 뒤 도포를 차려입고 필요한 만큼의 인부를 대동하여 현지로 가서 먼저 산신과 나무에 고사를 지내고 벌채한 뒤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운반 도중의 보호와 협조를 도중의 각 고을 현감에게 의뢰하고, 잡인이 행렬의 앞을 가로지르지 못하게 한다.

또한 운반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체의 불손한 언행을 삼가하며 조용히 근엄한 마음으로 운반한다. 이 행렬이 안동고을 내에 진입하면 연도의 마을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맞이한다. 읍 근교 약 2㎞ 지점에 이르면 각 편의 원로와 관계자들이 도포차림으로 영접을 나간다. 이때 각 편의 청장년들도 상봉 장소까지 나가 크게 이들을 환영하고 “동부야 워-” 하는 환호성을 지르며 보관할 장소까지 인도한다.

보관 장소는 내외를 정결히 하고, 집 주위에 금색을 하여 부정을 막고 외인의 출입을 금한다. 특히 부녀자의 접근을 엄금한다. 이 날로부터 차전놀이 당일까지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교대로 밤낮을 지킨다. 차전놀이를 하기 전날 밤에는 엄숙히 고사를 올리고 필승을 기원한다.

3. 동채의 제작 및 구조

정월 12일이 되면 동채를 만들기 시작한다. 목공과 소임을 맡은 주민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이 일에 참여한다. 특히 목공은 차전놀이가 끝날 때까지 외출을 금하여 기밀 누설과 부정을 막았다. 목공은 항상 의관을 쓰고 작업하며 삼·칡·모발 등을 합하여 세 가닥으로 줄을 꼬고 올림대 나무를 알맞게 불에 굽는다. 방석을 만들 때나 동채를 만들 때는 힘센 장정 3~4명이 물을 뿜어가며 힘차게 당기고 떡메로 다져가며 견고하게 만든다.

동채의 크기는 동서부가 각기 비밀리에 제작하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동채를 중후하고 견고하게 만들면 민첩하게 움직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상대편이 동채를 부수기 힘들고, 동채가 길고 폭이 좁으면 동채꾼이 많이 참여할 수는 있으나 움직임이 둔한 점을 고려하여 알맞은 크기로 만든다.

동채에는 체목·가르새·방석·고삐·고삐대·올림대 등의 부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 부품들을 조립·고정시키기 위한 참나무·등칡·삼·사람의 모발 등의 재료가 필요하다. 재료가 갖추어지고 부품이 완성되면 조립과 결박을 시작한다. 먼저 체목에 가르쇠와 올림대를 끼우고 나머지 부분을 다 조립한 뒤에 준비된 끈으로 가르쇠와 올림대를 견고하게 묶는다.

한편 청소년들의 차전놀이에서 사용되던 째기동채의 제작과정은 본동채에 비해 훨씬 간단하고 그 규격도 자유롭다. 알맞은 서까래나 목재 두 개만 있으면 그 머리를 교차하며 묶고 두 나무 사이에 가르쇠를 넣어서 새끼줄로 고정한 뒤 고삐줄을 달면 째기동채가 된다.

4. 놀이꾼의 편성과 역할

차전놀이의 인적 구성은 대장·머리꾼·동채꾼·놀이꾼, 그리고 동채의 좌우와 뒤를 따르는 각 편의 주민들로 이루어진다. 대장은 총지휘자로서 출전 경험이 많고 대담하며 통솔력 있는 사람을 추대한다. 다음으로 머리꾼은 차전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최정예이다. “차전놀이는 머리꾼 싸움이다.”라는 관습적 표현은 차전놀이의 승패가 머리꾼 싸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주 용맹하고 거친 사람을 “동채 머리꾼 같다.”라고 하는 표현도 머리꾼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용맹하고 완력이 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머리꾼들은 맨 앞에 1인, 그 뒤에 2인, 그 뒤에 3인 등의 순으로 마치 피라미드와 같이 동채 앞에 배치된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팔짱을 끼고 어깨로 미는 ‘밀백이’로 적을 분산 격퇴시켜야 하며, 그 이외의 행동은 못하게 되어 있다. 머리꾼 싸움의 격렬함은 “밀백이 할 때 밀어붙이는 힘이 워낙 세기 때문에 발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보름 아침에 먹은 찰밥이 목구멍을 넘어온다.”라는 관습적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그만큼 양편에서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동채꾼은 직접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로서 앞채꾼과 뒤채꾼으로 구성된다. 앞채꾼은 힘센 사람들로 한다. 앞채꾼은 동채를 이탈하지 않고 동채와 생사를 같이 한다. 앞채꾼들은 적의 동채에 접근하였을 때 동채를 부수거나 동채 위에 올라가서 밑으로 누를 수 있다. 뒤채꾼은 비교적 둔한 사람이라도 키가 크고 힘이 있는 사람으로 한다. 이들은 앞채꾼의 움직임에 따라서 움직이며 동채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각 편의 동채를 따르는 주민들은 자기편의 동채를 보호하는 한편 열렬하게 응원하면서 신명을 돋운다. 이들을 놀이꾼이라고도 한다. 앞놀이꾼은 때로 머리꾼 행세도 하고, 뒤놀이꾼은 뒤채꾼을 보호하다가 사정에 따라서는 뒤채꾼 역할도 한다.

5. 우군(友軍)맞이

정월이 되면 청소년들의 째기동채싸움이 시작되면서 읍내에 서서히 차전놀이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한다. 정월 14일에서 15일 오전까지 각 편에서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시내를 누빈다. “동부야(또는 서부야)! 워! 이이 히히!” 하고 환성을 지르며 행진하다가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밀면서 머리꾼 훈련을 하며, 이 과정이 거듭된다.

이때 소형의 동채에 사람을 태우고 놀기도 한다. 우군이 각 면에서 도착한다는 연락이 오면 그쪽에 가까이 있는 패가 마중을 간다. 마중하는 쪽과 우군은 약 10m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서서 일제히 “동부야(서부야)! 워!” 하고 두 세 차례 환성을 지른다. 또 “이이 히히”하고 그 자리에서 동동거리며 손을 높이 올려 춤을 추다가 쌍방이 돌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월사 덜사”하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 후 다시 두 편으로 나누어 마치 머리꾼 싸움을 하는 것처럼 힘차게 밀백이를 연습한다. 약 2~3분 간 연습을 하고 전체가 행진하는 방향을 향하여 서서 “동부야(서부야)! 이이 히히!” 하고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고 뛰어간다. 이때 반 정도는 속력을 빨리하여 약 30m를 뛰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속도를 늦추어 뛰어서 20m 쯤 행진한다. 약 10m의 거리가 생기면 모두가 정지하여 마주보고 서서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머리꾼 싸움을 연습한다.

6. 싸움

싸움 당일이 되면 놀이 장소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침부터 찾아드니 정오가 되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 각 편에서는 면 지역에서 오는 우군을 모았다가 정오가 넘으면 앞놀이를 할 때 사용하던 작은 동채에 사람을 올려 태운 채로 속속 모여들어 같은 편끼리 머리꾼 싸움을 연습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키다. 이때 각 편에 속하는 주민들도 “동부야(서부야)! 밀어라!”를 연호하여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킨다.

이런 중에 오후가 되어 양편의 동채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수천의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환호한다. 차전놀이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도 앞놀이를 중단하고 함성을 지르며 자기 편 동채를 향하여 달려가서 진용을 갖춘다. 이윽고 싸움이 시작되면 먼저 머리꾼들의 밀백이가 격렬하게 전개된다. 양편은 수백m씩 밀고 밀리는 접전을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한다. 밀백이가 워낙 격렬하여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이다.

동채 위에 올라탄 대장은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약속된 수신호(手信號)를 이용하여 지휘한다. 이때 동채꾼들은 대장의 지휘를 잘 볼 수 없으므로 앞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인다. 양편은 서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보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주위의 사람들은 열렬하게 자기편을 응원한다. 머리꾼 싸움이 일방적으로 전개되어 상대방의 동채가 노출되면 머리꾼들은 그대로 상대방의 동채로 돌격하여 동채를 잡아채서 땅에 떨어뜨린 뒤에 가리가리 해체해버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머리꾼 싸움이 팽팽하게 전개되면 양편의 대장들은 머리꾼 싸움의 동향을 보아가며 기회를 노리다가 약점이 보이면 비호같이 앞으로 이동하여 상대방의 동채를 밑에 깔고 누른다. 상대방은 빠져나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앞채꾼과 머리꾼들은 동채의 앞에 달라붙어서 상대방 동채를 내리누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접전 끝에 아군이 우세하여 적의 동채를 점령하면 삽시간에 동채의 방석과 결박줄을 제거하고 동채를 산산이 뜯어버린다. 이긴 편은 함성과 함께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이 까맣게 던져 올리며 승리를 자축하는 한편, 뜯어낸 동채의 부품을 여러 패가 나누어 을러메고 “월사! 덜사!”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밤이 늦도록 읍내의 거리거리를 누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안동차전놀이는 안동놋다리밟기와 함께 안동 고을의 새해맞이 축제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가는 대동놀이 가운데 하나였다. 안동 지역 주민들은 거듭되는 훈련과 대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움직여 상대편과 맞서기 때문에 조직적 단결심을 높일 수 있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소리 지르고 힘을 쓰는 가운데 신명이 고조되고 저절로 운명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동부와 서부 가운데 이기는 편에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따라서 차전놀이는 농민의 풍년기원을 바탕으로 한 농경의례놀이라 할 수 있다.

[현황]

안동차전놀이는 꾸준히 전승되어 오다가 1922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1969년 1월 7일에 안동차전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고, 곧바로 ‘안동차전놀이 보급회’가 설립되어 전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동차전놀이 보급회는 1986년 안동차전놀이 보존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0년 7월 22일 안동차전놀이 전수 교육관이 개관하였다. 현재는 매년 안동민속축제 때 ‘안동차전놀이 보존회’의 주관으로 차전놀이를 시연하고 있다. 1969년 1월 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0.12 내용추가 " 2020년 7월 22일 안동차전놀이 전수 교육관이 개관하였다." 내용 추가
이용자 의견
지** 현황 부분의 차전놀이 전수교육관 내용을 추가해주세요.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6857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따라 내용수정을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