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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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友潛 |
영어음역 | Ryu Ujam |
이칭/별칭 | 상지(尙之),도헌(陶軒),유우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명수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지(尙之), 호는 도헌(陶軒). 증조할아버지는 류윤선이고, 할아버지는 류성이다. 아버지는 류복기(柳復起)이며, 어머니는 영덕정씨(盈德鄭氏)로 참봉 정진(鄭溍)의 딸이다. 할아버지 류성이 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무실마을에 터를 잡음으로써 무실마을이 전주류씨들의 400여 년 세거지가 되었다. 류우잠의 할아버지가 두 아들을 남기고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김씨 부인은 머리를 자르고 귀보리죽으로 연명하며 삼년상을 치른 후, 상을 마치는 날부터 곡기를 끊고 자진하여 나라에서 열녀로 정려(旌閭)되었다.
[활동사항]
류우잠(柳友潛, 1575~1635)은 평소 장흥효(張興孝)와 이준, 김시온(金是榲) 등과 도의로써 교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키자 19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1594년 팔공산(八公山)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적과 싸웠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인조의 어가(御駕)가 강화도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를 규합, 적과 싸울 목적으로 훈련하였으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 하여 중도에 그만두었다.
아버지와 류우잠, 그리고 아들 류직(柳㮨)까지 3대에 이르러 무실마을의 전주류씨를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 잡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젊어서는 임진왜란을 겪고 장년이 되어서는 병자호란을 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시대를 만나 벼슬의 뜻을 접고 처사로서 일생을 마쳤다. 도정절(陶靖節, 도잠의 시호)을 늘 사모하여 그의 호도 도헌이라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도헌집(陶軒集)』 2권 1책이 있는데, 전주류씨 세고(世稿)인 『기양세고(岐陽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문집 중에는 향중인들을 대신하여 지은 「체상입부시진폐조목(體相入府時陳弊條目)」이 있다. 이는 도체찰사가 안동부를 방문할 때 건의할 내용을 정리한 글로, 당시 안동부의 현안을 6개 조목으로 나누어 진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