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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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宗準 |
영어음역 | Yi Jongjun |
이칭/별칭 | 중균(仲勻),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씨(太庭逸氏),장륙거사(藏六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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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성별 | 남 |
몰년 | 1499년 |
본관 | 경주 |
대표관직 | 의성군수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勻),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씨(太庭逸氏)·장육거사(藏六居士).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승직(李繩直), 아버지는 진사 이시민(李詩敏),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종준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5세에 글을 익혀 7세에 글의 뜻을 통했다. 10세 때 아버지에게 “경서는 모두 성현이 전해 준 문자이고 때론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주역(周易)』은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세 성인이 직접 쓴 책이니 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책이다. 학자(學者)는 『주역』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13세에 문장을 이루었는데 청수(淸秀)한 풍채에 도량이 쇄락(灑落)하여 신선이 하강한 듯했다고 한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했는데 김종직이 “중균을 보면 가슴이 시원하게 트인다.”라고 했을 만큼 맑고 빼어난 풍채에 성품이 단아하였다. 김종직 문하에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우재(迂齋) 박한주(朴漢柱),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과 가까이 사귀며 도의로 상호 격려하였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초급 관직을 거쳐 1487년 이조좌랑으로 일본 사신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호송관으로 동래에 이르렀을 때 왜사가 선생의 서화를 얻고 보물을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사간원정언 재임 중 외척이 권세를 잡을 조짐을 간하여 강직하기로 조정에 알려졌다. 1494년 의성군수로 제수되어 부임 초에 교궁(校宮)의 퇴폐함을 보고 녹봉을 털어 이건한 뒤 유망자를 모아 송시습례(誦詩習禮)를 하게 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부관참시와 무오오현(戊午五賢)의 치죄를 반대하고 류자광(柳子光)을 극형토록 상주하였다가 오히려 죄를 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신색이 불변하며 말없이 땅바닥에 크게 ‘일(一)’자를 그어 표현하였다. 태장(笞杖) 80에 부령(富寧) 봉수노우역(烽燧爐于驛)으로 귀양 가던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에 이르러 이사중(李師中)의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시가 연산군을 원망하는 뜻을 품었다 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장살당하였다. 이종준은 시와 서화에 능하였으며 의약, 복서(卜筮),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다. 그림으로 「송학도(松鶴圖)」가 있으며 의성 현령(義城縣令) 재임시 경상도 좌도의 지도 초본을 제작한 바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었다.
[상훈과 추모]
이홍준(李弘準)이 가장(家狀)을, 이현일(李玄逸)이 묘갈명을, 홍여하(洪汝河)가 묘표음기(墓表陰記)를, 배동환(裵東煥)이 유허비명(遺墟碑銘)을 지었다. 1506년(중종 1)에 신원되고 복관되었으며 숙종조에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鹿里社)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