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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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屛山別神- |
영어의미역 | Village Tutelary Festival in the Byeongsan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
집필자 | 조정현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서 호랑이의 해를 피하기 위해 주민들이 지내던 마을 공동체 제의.
[개설]
병산별신굿은 병산리의 금병산 일대에서 지난 갑자년인 1924년까지 범의 해를 피하기 위해 매 3년마다 주민 공동으로 지내는 무당굿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주향으로 모시는 병산서원이 있는 풍천면 병산리의 각성받이 농민들과, 풍천면 하회리 풍산류씨의 세력권에 생활 기반을 둔 정자골과 효부동 세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는 일절 쇳소리를 낼 수 없다가도 별신굿 때만은 외지에서 무당을 불러와 동네 굿패와 함께 병산서원 뒤 산등성이에 있는 서낭당(도령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별신굿을 벌였다.
[연원 및 변천]
별신굿을 통해서 살펴보면 서원이 있는 병산동과 효부골, 정자골 세 개의 자연마을이 모여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풍산에서 병산서원을 지금의 병산동으로 옮긴 시기는 1605년(선조 38)이다. 그 이전의 기록에서 병산동이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인 모둠살이가 시작된 것은 병산서원이 옮겨온 뒤라고 할 수 있다.
“별신굿을 벌여낸 세 마을의 사람들은 대부분 하회류씨와 서원에 생활근거를 두고 살았으나 하회동의 별신굿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따로따로 행해졌다. 효부동은 골짜기 속에 형성된 마을로 약 40여 호가 살고 있다. 진주강씨의 씨족마을이며, 400년 전 쯤에 강씨 선조가 처음 정자골에 와서 정착을 했다가 200년 전쯤 해서 효부동으로 건너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강씨 전에는 장씨가 살았는데 그 때 효부가 났다고 한다. ‘소부골’로 불려오다가 근래에 와서 효부골로 부르고 있다.
정자골은 효부동에서 강을 따라 약 1㎞쯤 가서 있다. 지금은 10호가 채 되지 않는 가구가 살며 마을 정면으로 강을 향하여 U자형 모양을 그리면서 효부동에서 원병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지나간다. 이곳은 마을 입구에 안동김씨 소유의 정자가 있어서 정자골이라고 한다. 전답이 없으며 풍산뜰에 경작지가 있다. 원병산은 병산서원이 있는 동네를 말한다. 경작지라고는 밭이 조금 있을 뿐이고 20여 호도 채 안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병신굿을 할 때에는 약 5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결국 병산별신굿을 이루어낸 세 마을 주민들은 하회류씨와 서원이라는 지배 세력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별신굿을 3년마다 벌여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의 입지가 하회보다 강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노인들 말에 의하면 풍산읍 수곡리 일대에서 옛날 거행됐던 ‘수동별신굿’과 바로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낙동강 줄기를 따라 3km 쯤 가면 나오는 하회동의 ‘하회별신굿’과 함께 안동 일대에 크게 이름이 나서 별신을 하는 날에는 외지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여든 큰 놀이였다고 한다. 이 별신굿 때는 나무로 만든 덕달(탈)을 쓰고 광대들이 탈놀이를 하였다.
[절차]
제의의 과정을 마을공의, 서낭대 제작, 걸립, 무당 합류, 신내림 등의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마을공의
세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음력 정월 초 3일에 가장 나이 많은 어른 집에 모여 별신에 관한 마을공의(공사)를 연다. 여기서 산주(山主)와 굿패, 광대를 정하게 된다. 산주가 결정되면 서낭대(내림대)를 만들고 하당(下堂)을 설치한다. 산주는 유고가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도산주’, ‘입산주’ 두 사람을 뽑는다. 입산주는 제물을 장만하는 뒷일을 보고 도산주가 별신을 주제한다. 하회마을에는 산주라는 한 명의 사제자가 있는 반면 병산의 도산주와 입산주는 한층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하회와 병산의 기본적인 제의구조는 동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2. 서낭대 제작
서낭대는 길이 450㎝, 지름 30㎝ 정도 되는 큰 나무로 만든다. 끝에 솔가지와 댓잎을 달고 긴 직사각형의 천에 ‘병산별신(屛山別神)’이라고 써서 깃대처럼 달았다고 한다. 또 하당을 별신이 있을 때만 설치하는데, 서원 앞의 넓은 밭(현재 조병두 집 앞에 있는 밭)에 한 발 정도의 나무 3개를 삼발 모양으로 세우고 금줄을 둘러친다. 산주가 결정되면 병산동의 모든 집에서는 매일 물을 떠 놓고 치성을 드리며, 산주는 집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물동이에 물을 매일 떠 놓으며 정결히 한다.
3. 걸립
굿패와 광대가 결정되면 이레부터 열이틀까지 닷새 동안 세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립(乞粒)을 한다. 이때는 광대와 굿패들이 함께 행동하며 놀 때도 같이 한 장소에서 논다. 서낭대를 항상 앞세우며 이동할 때는 서낭대·초레(암수 2개로 넉자쯤 되며 접고 펼 수 있는 나발)·광대·동뎅이(무동) 2명, 그리고 풍물치배 등이 뒤따른다. 굿패들의 복장은 패랭이에 종이꽃을 단다. 행매(상모)를 돌리고, 흰 옷에 빨강·파랑·노랑 3색 띠를 허리에 하나, 그리고 어깨에서 허리로 교차되게 맨다. 동뎅이란 안동 지역에서 부르는 무동의 명칭으로 효부동에서 1명, 병산동에서 1명이 나오게 되어 있다. 머리에 달비를 해 넣어 치렁치렁 흘러내리게 홍댕기를 맨다. 또 길이가 한 발 정도 너비 10km 정도 되는 긴 천(1명은 노랑, 1명은 빨강)을 머리에 매서 뒤로 늘어뜨리고, 허리에는 커다란 귀주머니를 두 서너 개 차고 “돈이야” 하며 구경꾼이 주면 받아 넣었다고 한다. 걸립 때는 둘 다 남장(男裝)을 했다.
4. 무당 합류
열이틀로 걸립이 모두 끝나고 열사흘에 무당이 효부동에 도착해서 그 곳에서 하룻밤을 잔다. 갑자년에는 안동군 서부 한식골에서 ‘자돈네’라는 큰 무당을 불러와 ‘면별신’을 하였다. 자돈·자돈부인·징수 등 3명이 왔는데, 자돈부인은 당시 40대로 얼굴도 예뻤고 춤과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하여 구경꾼에게 큰 인기였다고 한다. 4대 이상 이어진 세습무이다.
열나흘 아침에 무당 일행이 아침을 먹고 효부동 사람들과 함께 병산동을 향하여 떠난다. 한편 병산동에서는 굿패들과 광대 일행이 무당을 마중하기 위해 정자골로 나온다. 이 때 동뎅이는 다홍치마에 삼호장한 흰 저고리를 입어 걸립 때와는 달리 여장(女裝)을 한다. 이 두 패는 중간인 정자골 앞 굽은 길에서 서로 마주보고 만나게 된다. 무당패는 효부동에서 정자골로 꺾어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큰 회나무에서 동군들과 만나 한판 놀고 병산동으로 향한다.
5. 신내림
병산동에 함께 들어와 열나흘 밤 12시에 서낭당(도령당)에서 원무가 서낭대에 신을 내림받는다. 내림대를 산주와 동네의 노인들이 붙잡는다. 무당이 신을 청해서 신이 내리게 되면 그 큰 내림대가 저절로 쿵쿵 뛰어서 쓰러지지 않게 꼭 붙잡으려 했다고 한다. 내림을 받으면 15일 아침에 산주와 동군들이 밥을 해서 당에 올라가 차려놓고 두들기며 놀다가 내려온다.
내려올 때 효부동과 정자골, 병산동과 서로 패가 있어서 동뎅이를 중심으로 밀고 밀치는 패싸움을 하면서 내려온다. 이 때 동뎅이가 다치지 않게 힘센 사람이 동뎅이를 받친다. 산등성이를 내려와 서원 앞 강가 모래사장에서 하루 종일 굿패와 무당·광대 등이 어울려서 놀다가 해가 지기 전에 하당을 치워버린다. 그 후에 악기·의상·탈 등은 병산서원에 보관시키고 별신은 끝이 난다.
[현황]
병산별신굿은 병산동·정자골·효부골 등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3년마다 벌였다. 이런 별신굿은 주술 종교적 성격이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제의이다. 마을의 풍물패들이 벌이는 걸립과 함께 무당이 효부골부터 차례로 병산을 향해 굿을 하며 들어와서 마침내 큰 굿판을 벌이는 형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