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49 |
---|---|
한자 | 官衙遺蹟 |
영어의미역 | Remains of Traditional Government Offi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신대광 |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조선시대 수령이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
[개설]
관아 안에는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인 동헌과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사적인 공간인 내아,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공적 여행자를 맞이하는 객사, 고을의 징세에 관여한 향청, 아전의 집무처인 질청, 범죄자를 치죄하는 감옥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어느 고을을 막론하고 공해(公廨)로서의 기본 건물로 객사와 아사(衙舍)·관청 등이 있었고, 부속 건물로 문묘·사직단·여단·옥사(獄舍)·창사(倉舍) 등이 있었다.
객사는 일명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실질적인 기능은 중앙으로부터 온 사신의 숙소였으나 이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곤 하였다. 객사는 보통 한 고을의 가장 중심 되는 지점이나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에 배치하였는데, 객사 건물은 일반적으로 솟을지붕 형태로 건립하였으며 중앙 칸을 높여 좌우익 칸과 달리하였다.
그 다음 중요 시설의 하나로는 동헌(東軒)이 있었는데 이를 일명 정청(政廳)이라고 하였다. 동헌은 고을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객사와 더불어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농업이 경제의 기반인 사회에서는 물화가 재산의 바탕이므로 이를 보존·관리하기 위한 창고는 일찍부터 축조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에 많은 창고가 축조되었다.
[규모]
안산관아의 전체적인 규모는 당시의 관원들 수를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는 음서(蔭敍) 출신의 종4품관 군수가 있었고, 그 휘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8명, 아전 22명, 통인 8명, 사령 12명, 관노 8명, 관비 5명, 객사직이 1명, 향교직 1명, 옥감고 1명 등 모두 70명이 상주하였다. 그 외에도 정조의 수원행행시 호위에 필요한 병력과 자체의 병력을 합하여 800여 명의 인력 동원이 가능하였다. 『경기각읍신정사례(京畿各邑新定事例)』에서는 1894년 이들 관원들에 대한 1년 급료로 4,000냥을 지급하였다고 되어 있다.
[위치]
조선시대 안산군의 읍치가 상록구 수암동에 있게 된 것은 1669년(현종 10)부터이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안산현관사중건기(安山縣官舍重建記)」가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1669년 이전의 안산관아는 현재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안산김씨족보』의 내용이 참조가 된다. 이 족보에는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에 옛 소릉의 화소(火巢)로 편입되어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조선 초기의 관아는 소릉지 부근인 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성안마을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41년에서 『송자대전』에 기록된 1669년까지의 228년 동안 안산관아는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겼다.”는 기록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관아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지점인 읍성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권148 「안산군조」에 “안산군의 진산은 취암이다.”라고 기록된 것도 안산군의 관아가 취암 아래쪽 지금의 읍성 터 부근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안산관아는 처음에는 단원구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소릉의 영조로 인하여 1441년 현재의 읍성 부근으로 옮겨가고, 1669년에 상록구 수암동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부터 1965년까지 이곳에는 수암면사무소가 위치하게 되었다.
관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안산현관사중건기」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땅이 밝고 시원해서인데,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비봉혈(飛鳳穴)에 해당한다고 한다. 비봉혈은 성인군자가 배출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읍터로 정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지세가 비봉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봉황이 날아가면 읍이 멸망하기 때문에 봉황이 좋아하는 대나무를 심어 봉황이 영구히 있게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안산관아 터에도 관아 앞 지대석 바로 밑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아사(衙舍)는 수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초석이 남아 있어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고, 옥사는 관아의 남서쪽에 있었다. 또한 창고는 56칸에 달하는 큰 건물로 관아의 남쪽에 있었는데 이 역시 훼손되어 장대석과 와편만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안산 객사는 관아의 동편에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경작지로 변해 있어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관아의 정문은 평근루(平近樓)였으나 이 역시 이미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