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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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都市安山-崔容信 |
영어의미역 | Education Town, Ansan and Choe Yongsi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대광 |
[개설]
개화기 경기도 안산 지역에는 많은 서당과 함께 관아 옆에 향교가 있어 지역의 초·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운이 쇠하고 서양 문물이 밀려오면서 학교 교육도 변화의 전기를 맞게 된다. 1899년 9월에 개교한 안산공립소학교는 안산 지역 근대 학교의 출발점이었다. 이는 안산의 근대교육 역사가 100년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안산이 신 공업 도시로 성장하기 전 이미 근대교육의 거점으로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안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이 일찍부터 뿌리내렸기에, 교육운동가이자 농촌운동가인 최용신(崔容信)이 1931년 본오동 천곡교회에 샘골야학당을 개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변화된 교육제도와 안산의 현황]
개화기 신학제의 제정에 따라 요즘의 교육과학기술부 격인 학부(學部)는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小學校令)」을 공포하여 초등교육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학부령 제3호로 「소학교규칙대강」을 공포함으로써 「소학교령」에 따른 소학교 교육의 대강을 제시하는 한편, 1896년 2월 학부령 제1호로 「보조공립소학교규칙」을 공포하여 공립 소학교에 대한 국고금 보조를 법적으로 강화하였다.
「소학교령」에 나타난 교육 목적은 아동의 신체적 발달에 비추어 국민교육의 기초와 그 생활상에 필요한 보통 지식 및 기능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소학교의 편제는 3년제의 심상과(尋常科)와 2~3년제의 고등과(高等科)로 나뉘었고, 실제 수업 연한은 5~6년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만 8세부터 15세까지를 학령(學齡)으로 정하였으며, 각 부·군은 관내의 학령 아동을 취학시키기 위한 공립소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로써 근대적 교육 체제가 갖추어진 셈이었다.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 반포 이후 을사늑약 시까지 전국에 설립된 51개의 관립소학교 중 경기도 내 설립 학교는 9개 교로 확인된다. 1896년 2월 10일에 설립된 경기관찰부립소학교(京畿觀察府立小學校)는 신 학제에 의한 경기도 내 최초의 학교이다. 이후 학부의 지정으로 소학교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개성·강화·인천·평택 등지에도 학교가 설립되었다.
정부는 1896년 8월 4일[당해년 1월 1일부터 태양력 사용] 23부제를 13도제로 변경하고, 한성부를 제외하고 관찰사가 있는 13도(道), 즉 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을 부로 하여 부윤을 두는 7부(府), 제주를 목으로 하는 1목(牧), 331군(郡)으로 세분하였다. 그래서 경기도에는 수원관찰부를 비롯하여 모두 38군을 두었다.
이와 같은 행정 개편에 따라 학부는 같은 해 9월 17일 지방 공립소학교의 위치를 정하고, 학교 수를 한성부와 13도 관찰부, 4항[인천, 부산, 원산, 경흥], 2부[개성, 강화], 18군 합계 38교로 하고 각 교 1명씩 교원을 배치하였다. 당시에 채용된 교원은 모두 한성사범학교 제1기생과 제2기생이었다. 이어서 1899년 새로이 개항한 옥구항[전라북도]과 성진군[함경북도]의 2개 항구, 덕원부의 1부(府)와 15군(郡)의 합계 18개교에 교원이 배치되었다.
이 해 11월 6일 안산군에도 교원이 배치되는데, 이때 배치된 교원이 김광식이다. 이어서 최정하[1901. 3. 2], 김건식[1901. 4. 8], 박지양[1903. 8. 28], 박윤형[1903. 10. 16], 김건식[1904. 1. 30], 정원석[1905. 10. 17]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1899년까지 학부가 교원을 배치한 공립학교는 51개 학교로, 한성부 공립소학교, 관찰부 공립소학교 13, 개항장 공립소학교 8, 삼부[강화, 개성, 덕원] 공립소학교 3, 각 군 공립소학교 26개 교로 추정된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산 지역에는 안산공립보통학교, 대부공립보통학교, 반월공립보통학교, 군자공립심상소학교, 군자공립보통학교, 화정간이학교, 사리간이학교 등이 세워졌다. 또한 당시 야학 및 학술강습소로는 안산청년야학, 죽률학술강습소, 논곡강습소, 오현강습소, 상곡강습소, 노리울강습소가 있었다. 그 후 해방을 맞이하면서 교육기관은 점차 늘어났으며 신흥 공업도시로 개발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많은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2009년 3월 현재 안산 지역에는 초등학교 53개교, 중학교 28개교, 고등학교 22개교, 대학교 6개교와 많은 사회교육 시설이 들어서 있다.
[안산 지역에 근대교육을 일으킨 최용신]
1. 어린 시절
최용신은 1909년 8월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를 아버지로 하여 2남 3녀 중 넷째[딸로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최용신의 선조는 원래 경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12대조 때에 나라의 정변으로 인하여 원산(元山) 섭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 이후 계속 그곳에서 살아 왔다. 당시 지방 유지였던 최용신의 할아버지는 개화기 사재를 들여 덕원에 학교를 세워 기울어 가는 나라의 기운을 교육으로 일으켜 보자는 구국교육자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가문의 내력이 훗날 최용신에 의해 꽃을 보게 된 것이다.
최용신은 집안이 가난한데다 아들이 아닌 넷째로 태어나 가족들의 관심 밖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구국교육자의 가풍과 어린 시절의 힘든 경험이 훗날 용기 있고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최용신은 10세 되던 1918년 두남학교에 입학해 2년간 다니다가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을 했으며, 1928년 같은 계열인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지식의 부족함을 느껴 1929년 경성에 있는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여 황애덕[1892~1971]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2. 인생의 지표가 되어 준 황애덕
최용신은 학창 시절 황애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황애덕은 1918년 2·8독립선언 때 여성으로서 적극 참여하였고,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할 여성 대표의 비용을 마련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 후 다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해 보내다가 그 해 12월 또다시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아 옥살이를 한 후 2년 만에 가출옥하였다. 그 후 황애덕은 협성신학교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교수로 있으면서 농촌운동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하였다. 농촌운동에 대해서 가르치고 적임자를 선정하여 파송하는 한편, 해방이 되기까지 16년간을 계속하여 각도 각처에 6개의 학교와 2개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농촌운동가인 황애덕을 신학교에서 만나게 된 최용신은 학문적인 배움과 함께 농촌으로 직접 들어가 농촌계몽운동 실습을 하였다. 황애덕이야말로 최용신의 인생에서 좌표를 제시한 사람이자, 빛나는 생애를 살아가도록 결정지어 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에 다니면서 첫해에는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이듬해에는 포항 옥마동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나갔다.
3. 안산으로 오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 졸업 1년 전 실습 겸 농촌계몽을 위하여 1931년 10월 23세의 나이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안산시 본오동]로 내려왔다. 샘골교회에서는 최용신이 오기 5년 전인 1930년에 단기 야학으로 수원구역 선교사 밀러(L.A. Miller)[1870~?]가 샘골강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러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몸이고, 단기 강습소만으로는 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소식을 밀러로부터 전해들은 여자기독교청년회, 곧 YWCA 농촌사업부는 즉시 샘골[泉谷]을 시찰하고 나서 최용신을 이곳 교사로 임명·파견하였던 것이다.
최용신이 처음 들어올 당시의 샘골은 주민이 총 20여 가구밖에 안 되는 가난한 농촌 마을이었다. 가난·빈곤·무지, 그리고 슬픔만이 오랜 세월 뿌리박혀 있었다. 최용신은 처음에 초보적인 한글·산수를 비롯해 재봉·수예·가사·노래·성경 등을 오전반·오후반·야간반으로 나누어 밤늦게까지 진행하였다. 3개월이 되자 이제는 학생들이 많아져 예배당에 모두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새로운 방안을 궁리하던 끝에 학원 인가를 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전시 체제로 돌입하는 단계에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한 터였다. 더구나 최용신은 요시찰 인물인 황애덕의 제자인데다, 당시는 신문사에서 주축이 되어 벌이고 있던 귀농운동, 즉 ‘브나로드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던 어려운 때였다. 그러나 교회를 비롯하여 염석주 같은 유지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932년 5월 중순경 어렵게 인가를 받았다.
학원 인가 후 최용신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학생 수는 60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최용신은 3부제로 나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루 수업 시간은 6~7시간으로, 주로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교육과 모세의 이야기를 가르쳤다. 자수도 한국 지도를 무궁화꽃으로 꾸미는 것을 가르쳤고, 음악 시간에는 「무궁화 이 강산 역사 반만년」이란 노래를 가르쳤다.
그러던 중 반월면 둔대교회 설립자인 박용덕(朴容德)이 3,477.70㎡의 땅을 기증해 극적으로 학원 터가 마련되었고, 어느 정도 기금이 마련되자 10월 27일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정초식을 거행한 지 2개월여 만인 1933년 1월 15일 최용신과 마을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샘골강습소가 완공되었다.
4.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유학
그런데 샘골강습소가 완공되자 최용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일제는 스스로 조직한 농촌진흥회 청년조직을 통하여 최용신의 애국적 농촌계몽운동을 평가 절하하는 등 방해 공작을 노골화하였다. 학원이 완공되고 봄이 되어 학생을 모집하니 1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학원 설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60명 이상은 수용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눈물을 머금고 50명을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때 YWCA에서 매달 보조해 주던 30원을 2년 만에 15원으로 삭감하였다. 최용신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조선생에게 최소한의 사례를 해 왔으나 그것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혼자 할 수도 없고 큰일이었다. 그리고 또 음양으로 힘이 되어 준 큰 일꾼 황동우 조차도 본인의 진학 문제로 사임을 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힘에 겨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현재의 지식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최용신은 1934년 3월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최용신은 1934년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약혼자 김학준도 만났다. 이때 김학준은 결혼을 요청하였으나 최용신은 샘골과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목표를 이룰 때까지 참자고 설득하였다. 또한 최용신은 여기서 오빠도 만나고 동생도 만나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5. 다시 안산으로 돌아오다
그러나 유학 6개월 만에 각기병에 걸려 최용신은 1934년 9월 귀국을 하였다. 처음에는 고향인 원산에서 요양을 한 뒤에 샘골로 가려 했으나 샘골 사람들은 누워만 있어도 좋으니 샘골로 와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였고, 결국 최용신은 샘골 사람들의 간청을 물리칠 수 없어 샘골로 오게 되었다. 최용신이 돌아온 날부터 샘골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샘골 사람들은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해 정성껏 최용신의 병간호를 하였고, 이에 최용신도 차츰 건강을 회복하여 전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건강은 차츰 회복되어 갔으나 반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YWCA가 재정난으로 더 이상 샘골교회를 돕지 못한다는 소식과 함께 1934년 10월에는 보조금을 완전히 끊는다고 최후통첩을 해 왔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인지 최용신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갔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병세가 점점 더 나빠지자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급히 수원도립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번갈아 그녀를 업고 수원까지 이동하였다. 병명을 알아보니 ‘장중첩증’이었다. 발병 후 시일이 많이 지났으나 늦게나마 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서둘러 재수술을 하였다. 당시 수원도립병원장이었던 김하등과 수원병원장 신현익이 최용신을 살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녀의 병은 이미 화농복막염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결국 최용신은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25년 6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최용신의 가족들은 그녀의 시신을 원산의 선산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약혼자 김학준의 집에서는 “약혼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내 집 사람”이라 하여 자신들의 선산에다 묻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샘골 사람들은 이를 허락지 않았다. 장례식을 샘골동리 장으로 할 것이며, 그녀의 유언대로 샘골강습소 근처에 묏자리를 잡겠다고 하였다. 결국 최용신의 집안이나 시댁 사람들은 완강한 샘골 사람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례일은 1월 25일이었다. 염석주를 준비위원장으로 하여 샘골교회와 학원이 연합해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 날 안홍팔이 최용신의 양력을, 목사 전재풍이 유언장을 낭독하였고, 영구는 친지와 아이들의 어깨로 발인하였다. 강습소 학생 120여 명을 포함해 영구를 따르는 조객이 1천 명이 넘었다.
안산시에서는 1994년 11월 28일,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기간인 6개월을 빼고 1931년 10월부터 1935년 1월까지 약 2년 9개월간 안산 샘골에서 헌신적인 애국운동을 펼쳤던 최용신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추서 청원을 하였다. 당시 청원자는 홍석필, 김우경, 김명옥이었다. 그리하여 최용신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제3399호]을 추서 받았다. 또한 2001년 2월 문화관광부에서 ‘이 달의 인물’로 지정하고 상록수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최용신의 정신과 「상록수」에 담긴 뜻을 계승하다]
1. 소설 「상록수」
「상록수」는 심훈(沈熏)이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지은 장편소설로,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15주년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같은 해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상록수」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우리 농촌은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수탈로 인하여 극도로 피폐해졌고, 이것이 심각한 국내 문제로 대두되자 관에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언론기관에서도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조선일보』의 ‘문맹퇴치 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운동들에서 취재되고, 또 이 운동들을 고무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광수(李光洙)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이다.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농촌사업과 민족주의를 고무한 공로로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으로 평가된다. 식민지 현실을 의식한 이 작품은 계몽운동가의 저항 의식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이상으로서의 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 구체적 상황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영화 「상록수」
소설 「상록수」는 두 번 영화화되었다. 첫 번째 영화는 1961년 신상옥이 감독하고, 최은희·신영균·허장강·도금봉·신성일이 출연하였고, 두 번째 영화는 1978년 임권택이 감독하고 한혜숙·김희라·이일웅·김형자가 출연하였다. 이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한 감독들은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어서 눈길을 끈다.
3. 「상록수」와 안산
1) 상록구청
안산시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노력한 최용신 선생의 계몽사상과 「상록수」의 깊은 뜻을 계승, 발전시켜 상록수 정신으로 승화하자는 의미에서 구의 명칭을 상록(常綠)이라 명명하여 2002년 11월 1일 안산시 상록구를 개청하였다. 아울러 디지털 상록, 상록강좌 등 지역의 각 활동 명칭으로 ‘상록수’를 사용하고 있다.
2)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
수도권 지하철 당고개~오이도역을 운행하는 4호선 안산선에는 상록수역이 있다. 상록구 본오동과 일동, 이동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주변에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 유동 인구가 많다.
1993년에 개교한 상록초등학교는 현재 59개 학급에 2,224명이 재학 중이며, 1993년에 개교한 상록중학교는 현재 55개 학급에 2,378명이 재학 중이다.
4) 최용신기념관
2007년 10월에 개관한 최용신기념관은 최용신의 얼과 정신이 담긴 샘골강습소가 있던 안산시 상록구 해빛나길 56번지[본오동 879-4[샘골서길 64]] 상록수공원 내에 있다. 지상 1층에는 교육실과 사무실, 지상 2층에는 전시실과 영상실이 마련되어 최용신의 숭고한 뜻을 알리고 있다. 최용신기념관에서는 2009년 8월 12일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학술대회와 ‘최용신과 한글 사랑’을 주제로 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또 안산시에서는 최용신의 생애와 농촌계몽운동 정신을 담은 뮤지컬을 제작, 공연을 앞두고 있다.
5) 상록수영화제
심훈의 상록 혼과 최용신의 계몽 정신을 빛내고, 청소년들의 예술 재능을 조기 발견하여 영상 예술을 통해 글로벌 인성 교육을 실시함은 물론, 예술인과 산업인의 화합의 장 마련을 목적으로 2007년부터 상록단편영화제가 매년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 그 외에도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최용신의 업적을 기려 최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4. 책으로 되살린 최용신
안산시는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한 것이다』, 『최용신 기억속에서 아시아로 걸어나오다』 등의 최용신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은 기자 출신 작가인 서병욱이 녹취록과 신문 기사, 연구 자료, 도서 자료 등을 토대로 최용신의 일대기를 정리하였다.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루씨고등여학교(樓氏高等女學校), 감리교신학교 시절이 당시 시대상과 자료를 통해 자세히 복원되고 있다.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한 것이다』은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한 윤유석 박사가 최용신 관련 사진 80여 장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였다.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한 것이다』에는 최용신이 교육활동을 펼친 야목교회, 둔대교회, 반월교회 사진과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이 실려 있다. 그간 잘못 알려진 사진의 내용과 제목도 바로잡았다. 또한, 『최용신 기억속에서 아시아로 걸어나오다』는 최용신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연구 논문을 묶은 책으로 최용신의 정신과 활동을 아시아 여성 운동사의 지평에서 조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