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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943
한자 獨立運動
영어음역 Dongniundong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전개되었던 민족운동.

[개설]

안산 지역 주민들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우리나라 내정 간섭을 한 시기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다양한 형태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운동]

1895년 을미개혁·을미사변·단발령 등에 반대하여 안산 지역 주민들이 안산관아(安山官衙)를 습격하고, 관리(官吏)들의 주택 8채를 공격하여 파괴시켰다.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순검들이 부상당하였고, 또한 안산군수 안욱상(安昱相)은 이미 도주해버린 뒤였기에 모였던 군중은 안산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산대(山岱)장 터에 4,000여 명이 모여 성토대회를 가졌다. 또한 이천을 중심으로 김하락 일행이 의병 모집에 나서자 안산 지역의 주민들도 호응해 이천으로 가서 이에 합세하여 항쟁을 벌였다.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일제의 강제적인 을사조약 체결로 국권회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참여하였으며, 그중 하나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교육계몽 운동이었다. 교육계몽 운동은 당시“교육과 식산(殖産)으로 실력을 양성한다.”는 자강 운동의 취지와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초지(草芝)에 이민선(李敏善), 신각동 윤세영(尹世榮), 구룡동 김용진(金容鎭) 등이 교육기관을 세워 신학문을 교수하였고, 원상리 사립대성학교(私立大成學校), 북방면 초동야학교(樵童夜學校), 신안의숙(新安義塾) 등이 설립되었다. 이때의 문명개화 운동은 민중 계몽을 통한 실력 양성을 일차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신문·잡지 등의 언론 활동과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등을 주로 하던 문화 운동의 형태를 취하였다.

국채보상 운동은 대일부채의 해결이 한국을 일본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무능한 한국 정부를 대신해 전 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부채를 상환하고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저지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907년 4월에서 9월까지 안산군 북방면 건건리에서 23원 20전을 비롯, 안산 지역 15개 처에서 모금된 돈이 대한매일신보사에 전달되었다.

[3·1운동]

안산 지역의 경우 당시 행정구역상 시흥·부천·수원군에 속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당시 경기도 지역 중 가장 많은 횟수의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안산 지역에서도 도시로부터 점차 농촌 지역으로 파급되며 3월 하순부터 농민이 시위의 주역을 이루었다. 또한 이곳의 시위 주동자들도 어떤 특정한 지도 사상이나 정치결사체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지도된 운동이 아니라, 각 계층의 민중이 스스로 사상과 투쟁 방법을 통하여 일으킨 만세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碑立洞]에는 18개 리(里)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주민이 윤병소(尹秉昭)·유익수(柳益秀)·홍순칠(洪淳七)·윤동욱(尹東旭)·김병권(金秉權)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튿날은 수원군 반월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31일 부천군 대부면에서는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 등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4일 시흥군 군자면에서는 강은식(姜殷植)·김천복(金千福) 등이 주도하는 시위가 있었다. 권희(權憘) 등이 장수산 군자면 내의 구(舊)시장 터에서 시위를 모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되었다.

[노동운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조선의 풍부한 원료와 값싼 노동력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1920년에는 회사령(會社令)을 철폐하였다. 이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급속히 성장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전쟁 중의 과대한 생산시설 확대로 인한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유휴자본의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일본의 독점자본이 자유롭게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제한을 철폐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관세도 철폐하였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까지는 주로 제사(製絲)·면방직·식료품 등 경공업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조선인 자본은 주로 양조업·정미업·요업·직물업 등 전통적 부분과 고무신 공업, 양말 공업, 생선 기름 제조업 등에 진출하였으나 일본 독점자본에 밀렸다.

안산 지역은 당시 공장지대가 아니었던 까닭에 노동자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서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한 염전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들도 일제의 착취에 항거하는 운동을 때때로 전개하였는데, 1935년 5월 4일 군자면의 군자염전에서 채염(採鹽) 운반 인부 40여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전개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농촌계몽운동]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계몽 운동 및 문맹퇴치 운동이 전개되면서 YWCA에서는 1931년 최용신(崔容信)을 안산의 샘골에 파견하여 농촌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지역의 유지들과 YWCA의 지원으로 건물을 신축하고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방학을 이용하여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8월 수암면 김완식(金完植), 반월면 박희준(朴喜雋), 군자면 민건식(閔健植), 안상옥(安商玉), 목내리에 최운식(崔雲植) 등이 활동하였고, 1933년 8월에는 수암면 월피리 목영만(睦榮萬), 수암면 이원식(李元植), 1934년 8월에는 군자면 차상동(車相同) 등이 한글 교육을 전개하여 민족혼을 불어넣는 활동을 벌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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